둘째와 둘째가 만나 결혼해 첫째를 낳아 함께 하다 보니, 둘째의 설움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한다. 서로 둘째로 살며 알게 모르게 받았던 설움이 꽤 있었던 모양이다. 첫째와 첫째가 만나 결혼한 형네 가족은 첫째의 설움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하는 것을 보면 첫째도 나름의 설움이 있는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어나 온전히 근 일 년 혹은 그 이상을 자신의 아빠 엄마로 믿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다른 애인, 여기서는 둘째가 생기니 일 평생 자기가 믿고 의지했던 세상이 무너지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첫째는 빼앗긴 전부를 위해 싸우고 둘째는 전부를 쟁탈하기 위해 싸운다. 이것은 첫째와 둘째의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아닌가 한다.


 아직 그 전부가 온전히 자신의 것인 우리 첫째가 백일을 맞이했다. 엄마 뱃속에 자리 잡아 생명으로서 세상에 존재하기 시작한 지 1년이 되는 날.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양가 부모님이 오셔서 같이 밥이라도 먹었겠지만 요즘 같은 상황에선 요원한 일이다.

 

 스튜디오를 가거나 출장 스냅을 부르는 일도 꺼림칙한 것은 매한가지. 50일 사진도 셀프로 찍었겠다 자신감이 붙어 아내에게 미리 이야기를 꺼냈다.

“예전에 형네 집은 백일상 나눔 해서 집에서 사진만 간단히 찍었는데.”

 

 둘째 조카의 백일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첫째 조카는 확실히 백일 떡을 받으러 갔던 기억이 있다. 내 말을 들은 아내는 흔쾌히 인터넷 카페와 블로그 이곳저곳을 들락날락하기 시작했다. 며칠 후 안양 인근에서 백일상 대여해 주는 곳 중에 괜찮은 곳이 있다며 링크를 하나 보내주었다.

 

 함께 앉아 다양한 컨셉의 백일상과 의상, 그리고 다른 아이들은 어땠는지 사진을 비교했다. 대부분의 사진 배경이 회색 아니면 흰색 벽지였기에 아내는 백일상이 놓일 위치가 어지간히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거실 외에 마땅한 장소가 없었을뿐더러 커튼의 색상이 느끼기에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실제로 보면 또 다를 거야.”

구도 확인 중

 늘 그렇다. 사진을 찍기 전에는 이게 괜찮을까 싶다가도 찍어 놓고 보면 괜찮은 것들이 있다. 물론 그 반대도 많지만.

마스코트 쥐선생(혹은 미키)과 함께.

 모던한 상. 따로 주문한 백일 떡과 수수 팥 떡, 그리고 송편. 바나나와 사과, 샤인머스캣까지 올리니 꽤 그럴싸한 백일상이 되었다. 의자는 아이 엉덩이가 쏙 들어가 넘어질 염려는 없었다. 다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아내가 뒤에 숨어 계속 의자를 잡고는 있었다. 아이가 간밤에 자다 깨다를 반복하느라 기분이 좋지 않았는지 웃는 표정은 없었지만 아내는 만족하는 얼굴이었다.

모자가 제법 잘 어울린다.

 아내가 백일상 외에 심혈을 기울여 고른 백일 한복도 그렇고 정장, 그리고 추가로 대여한 왕관 모양 모자를 특히 마음에 들어 했다. 제 것이 아닌 옷과 처음 앉아 보는 의자가 불편했는지 금세 아이가 칭얼거리는 바람에 많은 사진을 찍지는 못했다. 물론 합리적인 비용에 만족할만한 사진을 남겼으니 이로써 첫째의 백일은 여러 사람의 축하 속에 잘 지나갔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의 인내심은 오래가지 않는다.

 하지만 아직 생기지도 않은 둘째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벌써 드는 건 왜일까. 나중에 둘째가 태어나 백일을 맞이한다면 귀찮아하지 않고 적어도 이런 백일상은 꼭 해주리라 다짐해 본다.

할로윈 기념. 펌킨 대신 탠저린. Trick or treat! 나도 사탕 먹고 싶다 :D

 

 

2020년 7월 24일 출산 당일.

 

 코로나19 덕에 마스크를 벗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차로 이동을 결정한 순간부터 모두가 마스크를 벗지 못했다. 뒷좌석의 아내는 진통을 반복하다가 간간이 잠에 들었다. 괜히 마음이 아렸다. 새벽 두시에 거의 다 되어서야 무사히 병원에 도착했다. 아직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처음 도착한 병원, 가로등만 지키는 그곳에서 갈 길을 잃은 것은 비단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우선 조산사님과 아내만 먼저 본관 앞에 내려두고 나 혼자 주차장을 찾아 헤맸다. 그 새벽에 나를 안내해 줄 누군가 있을 리 만무했다.

 

 길가에 빈틈을 찾아 차를 넣고 빼기를 몇 차례. 급기야 주차금지 구역에 차를 대 놓고 시동을 껐다. 그렇게 가려다 말고 아내 번호로 온 전화를 받았다. 조산사님의 간단 명료한, 하지만 내게는 긴 설명이 이어졌다.

본관으로 들어와서 수속 밟고 2층으로 올라온 다음에 반대쪽 끝으로 와서 한층 올라오면 모자보건센터에요. 거기로 오면 돼요.

 침착하게 머릿속에 긴 문장을 되뇌며 나오는 길에 주차장 입구를 발견했다. 몇 번을 망설인 끝에 다시 차로 발걸음을 돌렸다. 마음만 조급해져서 평정심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렇게 주차장에 차를 밀어 넣고 나서야 산적한 문제 중 하나를 해결했다는 사실에 정신이 조금 들었다. 신분증과 카드만 챙긴 채 본관을 찾아 달렸다.


 본관 원무과에 도착해보니 이미 수속은 조산사님이 대신 진행해 주신 후였다. 입원 수속을 밟아야 하니 가서 주는 서류를 받아 오면 된다고 했다.

어떻게 가면 되나요?

 노파심에 내가 가야 하는 길을 다시 물었고 대답은 간결했다.

2층으로 올라간 다음에 반대쪽 끝으로 가서 한층 올라가시면 됩니다.”

 같은 설명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니 간간이 비상등 불빛만 비추고 있다. 끝도 보이지 않는 복도를 빠른 걸음으로 달렸다. 진통 중인데 이 길을 어떻게 갔을까, 무슨 문제가 생기진 않았을까. 마음이 급한 와중에도 처음 와본 이곳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계속해서 애썼다.

 

 길의 끝에서 발견한 계단으로 올라가니 굳게 닫힌 세 개의 문만 나를 마주했다. 몇 번을 아내에게 전화했지만 통화 연결이 되지 않았다. 발만 동동 구르며 그 앞을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했다. 이곳 말고는 갈 수 있는데도 없어 보였다. 잘못 온 건 아닐까 층 안내도를 몇 번이나 확인했을까 그때 굳게 닫힌 문 중 하나가 열렸다.

산모는 지금 검사 중이에요. 일단 이거 가지고 1층에 원무과 가셔서 입원 수속 먼저 밟고 오세요.

 원무과에 다녀온 뒤 또다시 기다림. 30분은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그때야 차에 실어둔 짐을 찾아왔다. 아내가 몇 번이나 신신당부했던 촬영 장비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그렇게 3층 의자에 앉아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까 다시 문이 열렸다.

“이제 들어오시면 돼요.”

 

 간호사가 먼저 입원과 진료 결과에 대해 이런저런 설명을 해줬다.

지금 산모 고열 때문에 아이도 위험할 수 있어서 바로 제왕 절개 수술 진행할 거예요.

 병원에 오자마자 확인한 아내의 체온은 병원으로 출발하기 전보다 조금 더 올라 있었다.

'38.4'

그리고 코로나가 의심되는 상황이라 검사 결과 나올 때까지 수술 후에 1인실을 써야 돼요.

 설명을 듣는 사이 검사를 마친 아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생각보다 밝은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수술실에 누워 수술 준비가 진행되며 대화를 나눌 시간을 허락해 주었다. 조산사님은 수술 준비가 시작되자 한마디 말과 함께 자리를 떠나셨다.

별일 없을 거예요. 기도할게요.

 수술 대기실에서 대화 내내 찾아오는 진통에 아내의 얼굴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손을 잡아주며 했던 말을 또 하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호흡해야지.

 마음이 좋지 않았지만 애써 태연한 척 노력했다. 그리고 수술실로 향하기 전 손바닥에 하트 하나 그려주는 것으로 많은 말을 대신했다.

잘하고 와.

 


새벽 3시 30분.

 

 수술은 30분 후 시작이었다. 그렇게 수술실로 향하는 뒷모습을 지켜본 후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가족 분만실에 덩그러니 남겨졌다. 이런저런 안내를 받고 의자에 앉아 두 손을 모았다. 몇 년을 찾지 않은 신을 찾아 아내와 태어날 아이의 안녕을 비는 것. 그것이 그 시간 내게 허락된 유일한 행위였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에야 머릿속을 채운 여러 생각들이 가라앉았다. 그제야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아내의 옷가지를 정리한 후 소파에 앉아 문을 마주했다. 피곤함이 몰려왔지만 잠들 수도 없었다. 잠이 들어서는 안됐다.

 

 창밖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가족 중 누구에게라도 연락하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아직 아내의 수술도 시작하기 전이었다. 물끄러미 흘러가는 시간만 바라보던 나는 휴대폰의 메모 앱을 열었다. 그러고는 정신없이 며칠 간의 기억을 더듬으며 지금까지 함께 겪은 모든 일을 차근차근 써 내려갔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보호자님.

 

새벽 4시 10분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내 눈앞에 아주 작고 여린 아이가 있었다. 인큐베이터 안에서 쌔근거리며 울지도 않는 아이. 아무 말도 아무 생각도 하지 못하는 내게 간호사가 간단한 설명을 했다.

4시 정각에 건강하게 잘 태어났고요. 기본적인 검사는 문제 없는데 산모가 열이 난 거 때문에 추가로 검사가 진행될 거예요. 그건 신생아실에서 따로 연락 갈 거예요.

산모는 괜찮나요?

이제 봉합 시작했을 거고 끝나면 회복실로 갈 거예요. 아버님. 사진 하나 찍으셔야죠.

 그제야 정신이 들어서 사진을 하나 찍었다. 이어 동영상을 찍기 시작하는데 안도감이 밀려왔다. 함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간신히 눈물을 참아내며 입을 벌렸다.

이제 가셔도 돼요.

 간호사들이 안쓰러운 표정으로 문을 닫고 돌아간 직후 소파에 앉아 입을 막고 오열을 했다. 건강하게 잘 태어난 아기에 대한 고마움. 진통에 몸을 비틀던 아내의 모습에 대한 미안함. 처음부터 고민 없이 병원에서 출산을 계획했어야 했다는 생각이 머리에 맴돌았다. 할 필요 없었던 고생을 시키고 아내와 아기를 위험한 상황에 몰아넣었다는 죄책감이 몰려왔다.

 

 그렇게 얼마나 흐느꼈을까,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찍어두었던 사진, 그리고 동영상을 돌려보았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조그맣고 작은 아기가 아내 뱃속에 있었다니. 몇 번이고 동영상을 돌려보는데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신생아 중환자실인데요. 코로나 검사를 받아야 하고요. 격리 후에 음성 판정 나오면 오후쯤에는 신생아 실로 이동할 거예요. 그리고 신생아 출산 검사는 문제없고요. 그런데 산모 백혈구 수치도 높았고 혈액 배양 검사를 해야 해서 아기는 5일 정도 입원해야 할 거예요.

 다른 말은 머릿속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문제없다는 말 외에는. ‘다행이다’라는 말을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다. 아내가 회복실에서 돌아온 후에야 그 말을 멈출 수 있었다. 돌아온 아내에게 한 마디 말로 모든 말을 대신했다.

고생했어.

 

 

 

2020년 7월 21일 - 예정일 하루 전.

 

 예정일을 넘기려는지, 아내의 진통은 좀처럼 시작되지 않았다. 초조해하는 아내를 위해 남편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처음부터 자연주의 출산을 준비했었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진통을 부르는 민간요법이 몇 가지 있긴 했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일 수도 있었지만.

 

하나, 파인애플.

둘, 수육.

 


2020년 7월 22일 - 예정일.

 

 평소와 다를 게 없는 하루가 시작되었다. 코스트코에서 고른 돼지 목살 한 덩이, 파인애플이 그날의 만찬이었다. 온갖 재료를 집어넣어 삶아낸 수육과 파인애플을, 아내는 그렇게도 맛있게 먹었다.

 

 

곤히 잠들어 있던 늦은 밤, 아내가 다급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이슬이 비친 것 같아.

2020년 7월 23일 - 예정일이 하루 지난날.

 

 안양에는 호우주의보가 내렸다. 이른 새벽, 아내는 나를 다급하게 깨웠다.

양수가 새는 것 같아.

 

 조기 양막 파수였다. 아내는 임신 초기부터 양수만 터지지 않기를 바라고 바랐었다. 그 바람이 무색하게도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들이 시작되고 있었다. 처음 겪어 보는 상황에 아내는 예민해져 날카로운 말을 쏟아냈다. 아내도 처음이지만 나라고 다를 것이 없었다. 침착하게 마음을 다스리며 받았던 교육 내용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교육을 받았던 대로 확인한 양수 색은 투명했다. 아직은 아이의 기분이 나쁘지 않다는 것. 그것만으로 한시름을 놓았다. 아내의 컨디션도 나쁘지 않아 보였다.

 

 조산사님과 통화하며 재차 상태를 확인했다. 지금부터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오늘 안에 수축이 오지 않으면 바로 산부인과로 가야 했다. 아내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 조산원에서의 출산을 바랐다. 그렇게 마지막 방법을 택했다.

 

불수산 - 당귀천궁차라 불리는 수축을 돕는 차.

 

 오후부터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불수산을 한 포 복용한 후 아내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저녁 6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수축이 오는 것 같아.

 

 챙겨 놓은 짐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수축의 간격이 좁아지길 기대하며 아내의 호흡을 도왔다. 수축의 간격은 점차 줄어들고 있었고 본가와 처갓집에도 출산이 임박했음을 알렸다. 아내와 나 모두 새벽엔 아이가 나오리라는 확신에 차 있었다.

 

 짧아지고 세지는 진통에 힘겨웠는지 아내는 방으로 향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덥다며 거실에서 창문까지 열어두었던 아내의 반응이 심상치 않았다.

에어컨 꺼.

 

 이불까지 뒤집어쓴 아내를 보며 별다른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저 갑자기 찾아온 진통에 몸이 힘든가 하는 생각뿐이었다.

불도 꺼줄 테니까 조금 누워 있어.

 아내도 나도 이미 며칠 동안 새벽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 피로가 누적된 상황이었다. 조금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질 거라 생각했다.

 

 언제라도 출산을 위해 출발해야 했다. 집안을 확인하고 음식물 쓰레기까지 버리고 오자 아내가 불안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열 좀 재줄래?

 설마 하는 마음으로 체온계를 집어 들었다.

'37.7 , 37.9'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다른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우선 조산사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설명을 듣고 잠시 고민하던 조산사님은 빠르게 결단을 내렸다.

일단 조산원으로 오세요.

 서둘러 침대에서 일어난 아내는 고열에 온몸과 이를 달달 떨었다. 한 겨울 찬 바람을 맞은 사람처럼. 그것도 이 한 여름에. 연애 5년 결혼 생활 2년, 도합 7년 동안 그렇게 아파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당황했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그것이 그 상황에 남편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2020년 7월 24일 - 예정일이 이틀 지난날.

 

 자정을 넘긴 시각, 조산원. 이미 수액을 두 팩이나 맞았지만 아내의 열은 떨어지지 않았다. 진통의 간격은 더 짧아지고 있었고 고통을 이기지 못해 속까지 한 번 게워낸 상황이었다. 함께 교육을 받았던, 출산 예정일이 비슷했던. 심지어 역아라고 했었던 산모까지 무사히 출산을 하고 돌아갔다는 이야기에 아내는 더욱 고집을 부렸나 보다.

 

 열이 몇 시간째 떨어지지 않고 유지되자 조산사님은 하나의 분명한 사실을 우리 부부에게 주지시켰다. 여기서 더 지체하면 아내와 아이에게 모두 좋지 않다는 것.

지금은 병원으로 가는 게 맞아요. 아빠가 짐부터 먼저 내려요.

 단호한 조산사님의 말에 나는 분주히 움직였다. 출산 방 앞에 걸어두기 위해 아내와 함께 만들었던 문패. 출산 과정을 촬영하기 위해 챙겨 왔던 촬영 장비. 출산 후에 아이를 닦아주고 함께 돌아갈 때 입힐 배냇저고리 등 옷가지가 담긴 캐리어를 꾸렸다.

 피곤함과 반복되는 예기치 못한 상황에 나는 덜컥 겁이 났다.

그런데 구급차를 부르는 게 아니고, 제가 직접 운전해서 가야 하나요?

 조산사님은 잠시 숨을 고른 후에 입을 열었다.

같이 가주면 낫겠어요?

 두말할 것 없이 아내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간이 흩날리던 빗줄기는 자취를 감춘 후였다. 신생아 중환자실이 있는 순천향대 서울병원으로 향하는 그 새벽. 절대 졸면 안 된다고 속으로 나를 다그쳤다. 길을 잘못 드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집중해서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귀를 기울였다. 비가 그친 텅 빈 도로 위를 내달리는 와중에 이젠 내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급체라도 한 것처럼 손까지 저려 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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