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 소설 현대 판타지 추천 요소

 현대 판타지의 성공 공식. 회귀, 먼치킨, 이세계, 타임슬립 등.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하는 일일드라마의 대표 공식과 닮아있다. 젊고 잘생긴 본부장. 까칠하고 예쁜 신데렐라. 성격 더러운 약혼녀. 그리고 불륜 등.

 

 나쁘다는 게 아니다. 독자와 시청자는 재미를 원한다.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이들은 그에 부응할 필요가 있다. 물론 새로운 시도도 필요하다. 빠르게 소비되고 존재했는지조차 모르게 자취를 감추는 요즘 세상이지만.


그래서 준비했다.

 나이를 불문하고 읽어볼 만한 현대 판타지. 웹소 혹은 웹소설. 명작 혹은 띵작. 먼치킨을 빙자한 게임 세계 혼합 결정체다.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 직장인 모두에게 재미를 주는 글. 초등생 이하 어린이는 보면 안 된다. 아저씨나 할아버지는 괜찮다. 여성 독자인데 괜찮나요? 겁낼 것 없다. 익명 보장이다.

 

 할 일 없을 때. 할 일 많을 때. 스트레스 받을 때. 주말에. 등하굣길에. 출퇴근 시간에. 화장실에서. 독서실이든 그 어느 곳에서든. 시간을 때우든. 심심하든. 킬링 타임을 하든. 어디서든 좋다.

 

Error Unknown

 

 


무엇이 다른가

하나. 제외된 모든 필수 성공 공식.

 현대 판타지의 대표적인 글들과 유사한 구조를 띠고 있지만 빽빽한 내러티브만으로 긴장감을 이끌어 간다. 신선한다는 말로 대체할 수 있다.


. 아이디로만 존재하는 등장인물의 이름.

 각기 다른 사연을 지닌 인물, 그들의 아이디가 주는 의미는 소소한 재미를 선사한다.

 


. 뒤섞인 여러 세계.

 뒤섞인 세계가 충돌하며 다양하게 벌어지는 사건은 글에서 눈을 뗄 수 없도록 만든다.


이게 지금 추천 글이 맞는가

 정확하다. 이 작자 스스로의 추천글이다. 물론 취향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 속았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렇다면 우선 첫 화를 읽어보자. 그래도 속았다는 생각이 들면 그다음 화를 보자.

 

 아직 이 글에서 머물러 소설은 단 한 문장도 시작해보지 않았지만, 아직도 속았다는 생각에 화가 나는가? 밀려오는 분을 참을 수가 없는가? 별점 테러와 신랄한 비평에 대한 욕구가 차오르는가?

 

 좋다. 일부러 찾는 수고를 덜기 위한 링크를 안내한다. 발전을 위한 별점 테러와 비평은 언제나 환영이다.

http://novel.naver.com/challenge/detail.nhn?novelId=885147&volumeNo=1

 

Error Unknown - Episode 1. 레벨 1의 생존자 (1화)

- 프롤로그 - 에모아르피제 대륙. 수많은 플레이어가 영웅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곳. 광활한 대지에 홀로 선, 전사 클래스의 플레이어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아이디, ‘전설급은아닌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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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ovel.naver.com/challenge/detail.nhn?novelId=885147&volumeNo=2

 

Error Unknown - Episode 1. 레벨 1의 생존자 (2화)

‘남자라면핑크의 사망까지 60초 남았습니다.’ 시스템은 ‘남자라면핑크’에게 사망 선고를 내렸다. ‘남자라면핑크’를 포함한 모두는 패드에서 정보를 확인했다. 이어 너나 할 것 없이 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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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ovel.naver.com/challenge/detail.nhn?novelId=885147&volumeNo=3

 

Error Unknown - Episode 2. World of game(1화)

세계는 크게 에모아르피제 대륙, 에피스 대륙, 라체 대륙, 파잇 대륙으로 나눠졌다. 세계의 정중앙, 센트럴 시티를 중심으로 에모아르피제는 북동쪽. 라체 대륙은 에모아르피제 대륙의 남쪽. 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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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ovel.naver.com/challenge/detail.nhn?novelId=885147&volumeNo=5

 

Error Unknown - Episode 2. World of game(2화)

에피스 대륙, S 구역을 드넓은 대로가 가로질렀다. 대로 양 옆으로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빌딩이 사열하듯 줄지어 서 있었다. 그리고 그곳의 중심, 오브제르 빌딩의 지하 벙커에 수십의 상위 랭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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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novel.naver.com/challenge/detail.nhn?novelId=885147&volumeNo=6

 

Error Unknown - Episode 3. 격발(1화)

에피스 대륙, A 구역의 버려진 보급소. 그 안에 멍하니 서 있던 ’남자라면핑크’의 이마에 붉은 점이 맺혔다. ‘닥치고헤드샷’은 본능적으로 그를 밀쳐냈다.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깨진 창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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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여행 가고 싶어.

 

“주아, 니가 거길 가면 내가”
“뭐?”
“아니.”
“그러니까 뭐?” 

 

 조롱 섞인 눈빛에 이어질 힐난은 굳이 상상할 필요도 없었다. 온몸에 찌든 기름 냄새는 낙인이라도 된 듯 쉬이 가시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태생을 증명하듯 주위에 머물렀다.

 

“돈은 그렇다 치더라도 영어도 한마디 할 줄 모르면서 뉴욕을 어떻게 가냐?”
“갈 수 있어.”
“뉴욕이 미국 어디에 있는지나 아냐?”

 

 불이 꺼진 패스트푸드 가게 앞의 둘을 비추는 조명도 하나둘 숨을 죽였다. 주아의 머릿속에서 길을 잃은 생각의 꼬리처럼. 부아가 치밀었다. 무슨 말이라도 내뱉지 않으면 오늘 밤은 잠을 이루지 못할 터였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녀의 가운데 손가락은 자신의 사고보다 빨리 움직였다.

 

“야! 이 년이!”
“중심에 있다고. 세상의 중심에.”
“기도 안 찬다.”
“그리고 나 영어 할 줄 알거든.”
“어디 한번 해봐라.”

 

 주아는 수북이 쌓인 기억의 먼지를 털어내어 다분히 고상한 문장 하나를 떠올렸다.

 

“How are you?”

 

 그녀는 가만히 친구의 표정을 살폈다. 알 수 없는 표정의 친구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제 가운데 손가락을 곧게 펴 보였다.

 

“야! I’m fine이라고 해야 할 거 아니야!”
“Welcome이다! 아주!”

 

 친구의 항변에 주아는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온 세상이 그렇게 자신을 비웃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세 가지 문제만 해결된다면 그 생각은 그녀의 머릿속에만 머물 것이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문제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조금 늦었지? 미안.”

 

 오랜 시간 그녀의 곁을 지켰던 기태였다. 어떤 순간에도 그를 떠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세상 모든 존재가 그녀에게 등을 돌려도 그는 자신을 지킬 유일한 존재였다. 그런 존재를 자신이 먼저 떠나야 할 이유는 없었다. 뉴욕이 자신의 중심이 되기 전까지는. 미간을 찌푸린 그녀의 눈동자는 멋쩍게 웃는 그의 두 눈동자와 마주했다.

 

“나 사랑해?”
“그걸 말이라고 하냐.”
“얼마나?”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우선 좀 걸을까?”

 

 주아의 친구는 그녀의 손짓에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홀로 가게 문을 닫는 게 익숙한 듯 더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주아 또한 그 상황이 익숙한 듯했다. 기태는 또한 별다른 대꾸 없이 그녀를 따라나섰다. 거리의 화려한 불빛은 길을 가득 채웠다. 음식점에서는 모든 냄새가 흘러나왔다. 고기 굽는 냄새와 찌든 담배 연기, 지나가는 사람들의 술 냄새까지. 그 모든 것은 그녀가 숨을 그늘이 되었다.

 

“기태야. 나 있잖아.”
“응. 듣고 있어.”
“뉴욕에 갈 거야.”
“뉴욕?”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헝클어진 머리만큼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자신이 늦은 것 때문일지 아니면 다른 것이 원인일지 알 수 없었다. 서둘러 이 수수께끼 같은 대화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뿐이었다.

 

“언제?”
“준비가 끝나면?”
“뭐하러 가는데?”
“잘 모르겠어. 그냥 가보고 싶어. 아니, 꼭 갈 거야.”
“얼마나 가려고?”
“글쎄. 한 달? 아니. 일 년? 그래. 그쯤이 좋겠다.”

 

 결국, 그의 사고는 정지했다. 덩달아 그의 걸음도 멈췄다. 온화했던 표정은 온데간데 없었다. 인내에 한계에 다다른 그의 두 눈동자는 그녀를 원망했다. 낌새를 눈치챈 그녀 또한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려 그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둘 사이의 공기는 차갑게 변했다.

 

“헤어지자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뭔데?”
“말투가 왜 그래?”
“내 말투가 어때서? 그딴 식으로 빙빙 돌리는 너보다는 한참 나은 거 아니야?”
“야! 정기태!”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녀의 시선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손에 들린 애꿎은 하얀 서류를 만지작거렸다. 알고 있었다. 어쩌면 오히려 먼저 말을 꺼내 준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지도 몰랐다. 체념한 듯한 그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무언가 결심한 듯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사실 오늘 내가 할 말이 있어서 온 거야. 차라리 잘 됐어. 너라면 분명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말을 해.”
“나 군대가. 기다려달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돼서는 내가 너무 비참하다. 처음부터 헤어지자고 말을 하지. 그랬으면 내가 조금 덜 비참했을 텐데.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겠냐만.”

 

 망치로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듯 멍했다. 그녀의 사고는 완전하게 정지했다. 어떤 말도 꺼내 놓지 못했다. 그 사이 그는 고개를 돌렸다. 둘의 사이는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갈게. 잘 지내.”

 

 그렇게 한가지 고민이 해결되었다. 다음 고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기태가 시야에서, 또 기억에서 멀어져가는 사이 주아는 휘청거렸다. 감당하지 못할 이별의 무게 때문이 아니었다. 어지러웠을 뿐이다. 불분명한 의식의 흐름 사이에 말 한마디가 자취를 드러냈다. 의사에게 들었던 마지막 말이었다.

 

‘길어야 6개월입니다.’

 

#2. 일어나면 그만인데.

 

 밝고 환한 빛. 눈이 부셨다. 이미 숨이 다한 것은 아니리라. 코끝을 찌르는 소독약 냄새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녀 곁의 새미는 눈물을 글썽였다. 근심 어린 표정은 좀처럼 거두지 못했다. 아마, 의사의 마지막 말이 그녀에게 공유된 모양이었다.

 

“새미! 알바는 어쩌고?”
“그냥 누워 있어.”

 

 그녀의 만류에도 주아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누워 있으면 니가 나 뉴욕에 데려다줄 거야?”
“미친년. 정말 너도 정상은 아니다. 그 몸으로 가긴 어딜가.”
“새미. 여기 누워 있으면. 언제까지 내가 여기 누워 있을 수 있겠냐. 길어야 6개월이라고 했어.”
“다른 병원에 가보자.”
“새미.”

 

 주아는 떨리는 그녀의 두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물끄러미 두 눈을 마주했다. 그녀의 눈가에 고여있던 눈물이 범람했다. 입꼬리를 올린 주아는 비아냥거렸다.

 

“나 아직 안 죽었잖아. 벌써 이렇게 울면 나중에 어떻게 하려고?”
“넌 진짜,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오냐?”
“아직 살아 있잖아. 그럼 된 거지. 새미. 나 이렇게 여기 있을 수가 없어.”
“방법을 찾아보자.”
“있잖아. 나. 여행이라고 가본 적이 없어. 흔한 수학여행 한번 말이야. 너도 알잖아.”

 

#3. 이제는 추억이라 말할 수 있는.

 

 이제는 기억나지도 않는 부모님 얼굴. 어린 주아에게 삶은 참 모질었다. 어린 그녀에게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닌 한 마디는 이랬다.

 

‘애미 애비 잡은 년.’

 

 이제는 세상에 없는 할머니가 그녀에게 지어준 다른 이름이었다. 부모와 주아가 함께 당한 자동차 사고에서 그녀 혼자만 살아남은 것이 이유였다. 술에 취해 손찌검이 시작되는 날이면 그녀는 몸을 웅크렸다. 저항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죄책감이 조금이라도 가실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멍과 상처만 늘었다. 특히 마음에 남은 분노와 생채기는 더 큰 상처가 되었다.

 

‘꼰대.’

 

 세상의 하나 남은 혈육을 그녀는 속으로 그렇게 불렀다. 한 번도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었다.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런 말을 듣는다고 해서 스스로 인정하지도 않을 것이기에.

 

 

 시간은 무심히 흘러갔다. 할머니의 허리춤에 가까스로 닿던 키는 어느새 머리 하나는 더 있게 됐다. 그렇게 열일곱이 된 어떤 날 그녀는 입을 열었다.

 

“갈게. 잘 지내.”

 

 그녀를 괴롭히던 속박과 구속에서 뗀 첫걸음이었다. 첫걸음마를 뗀 그녀를 본 부모의 표정이 자신 같았으리라.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뒤통수에 욕지거리가 쏟아졌지만 상관없었다. ‘애미 애비 잡은 년’은 응당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렇게 집을 나온 첫날, 갈 곳 없는 그녀는 우두커니 길 한구석을 차지했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패스트푸드 가게 옆 골목이었다. 휘황찬란한 불빛에 생긴 그림자가 그녀를 감쌌다. 까마득한 아늑함을 느꼈다. 어미의 부드럽고 따스한 품 같았다. 이런 느낌이 존재했는지조차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곳엔 ‘꼰대’의 성난 목소리도 매질도 없었다. 폐점 준비를 하는 새미의 의구심 가득한 눈빛만 없었다면 완벽한 순간이었다.

 

“집 나왔어?”

 

 주아는 대답 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 그녀를 곁에 붙들어 놓아야만 했다. 이렇게 나타난 구원자를 그냥 보낼 수 없었다.

 

“새미야. 안에 정리는 끝났는데.”

 

 기태는 누군가를 응시하는 새미를 발견했다. 이윽고 그런 그녀를 응시하던 주아를 발견했다.

 

“어?”

 

 벌어진 입은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았다. 몸은 주아를 향해 서 있었지만 긴장한 두 눈동자는 사방을 향했다. 그를 발견한 주아가 그와의 거리를 좁히는 사이 증상은 더욱 심각해졌다.

 

“기태! 너 여기서 뭐 해?”
“내 이름 알고 있었네?”
“당연하지. 같은 반인데. 그리고 벌써 한 학기가 지났는데 모르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아니 난.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 아닌 게 아니고. 나 여기서 일해서.”

 

 늘 이런 순간을 원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말을 꺼내는 순간, 어떤 실수라도 모든 기회를 영영 잃게 할까 두려웠던 그였다. 더 완벽하고 완전한 순간에 이뤄지길 원했다. 적어도 햄버거 냄새에 찌든 지금은 아니었다. 긴장감이 팽배한 사이, 새미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기태야. 너랑 얘랑 둘이 아는 사이야?”
“아니. 어.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얘는 오늘 왜 이렇게 어버버 거려. 거기 너.”
“나?”
“그래. 거기 너밖에 없잖아.”

 

 새미의 말투엔 날이 서 있었다. 주아는 개의치 않았다. 어떤 누가 자신에게 차갑게 대하더라도 지나온 세월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초조한 기태의 시선만 분주했다. 숨을 깊게 들이 마신 그녀는 새미의 두 눈을 마주했다.

 

“나 왜?”
“아직 내 질문에 대답 안 했는데.”
“아, 참. 내 정신 좀 봐. 나왔어. 오늘.”
“갈 데 있어?”

 

 주아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시선을 다시 그녀에게 돌렸다. 피식 새어 나온 웃음을 참지 못했다.

 

“우리랑 같이 갈래?”

 

 주아는 잠시 뜸을 들였다. 가출팸이다 뭐다 흉흉한 세상이었다. 기태를 안다고 했지만 잘 아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새미는 생면부지의 사람이었다. 묘한 분위기는 기태의 말로 정리되었다. 정리라고 표현하기에 애매한 부분은 있지만 달리 표현한 말도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 나쁜 애들은 아니야. 주아 너도 봐서 알겠지만 새미 쟤가 표정은 저래도 착한 애 거든. 나도 그렇고. 나한테 내가 나쁘지 않다고 말하는 건 조금 그렇긴 하네. 그래도 넌 오늘 이렇게 길가에서 지낼 수는 없잖아. 아, 미리 연락을 좀 하긴 해야 하는데 괜찮을 거야.”

 

 주아는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약속이나 한 듯 새미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안중에도 없는 기태는 신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늦은 밤 기다리던 엄마를 만난 아이처럼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엄마. 새 친구 데리고 가도 돼요?”

 

 기태가 통화에 빠진 사이 주아는 새미의 곁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제 입을 그녀의 귓가에 갖다 댔다.

 

“그래서 도대체 거기가 어딘데.”
“나눔의 집.”

 

#4. 오늘부터는.

 

 지난날을 떠올리던 주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었다. 창가에 시선이 머무는 사이 기억은 수학여행을 떠나던 날 아침에 다다랐다. 그날도 그랬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연락 왔다.”

 

 그녀의 담임은 어쩔줄 몰라했다. 그 말에 그녀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교무실에서 마주 앉은 그녀의 두 손을 말없이 쓰다듬는 것밖에는. 집을 나온 뒤로는 스스로 흔적을 찾아본 일이 없었다. 다만 ‘나눔의 집’ 엄마가 가끔 소식을 전해 주면 생사 정도 확인할 뿐이었다.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울면 돌아가신 엄마가 생각날 것만 같았다. 아빠도 말이다. 이제는 얼굴조차 희미했다. 성난 할머니의 모습은 그나마 선명했다.

 

 화장장의 뜨거운 열기는 모든 것을 불태웠다. 좋았던 기억. 좋지 않은 기억 모두. 이제 자신은 세상에서 완전하게 혼자였다. 제게 남은 것은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이었다. 그 사진에서는 모두가 웃고 있었다. 오래된 시절이 눈앞에 그려졌다. 포근한 엄마의 품과 부드러운 아빠의 목소리. 이제는 정말 없어져 버린 그녀의 할머니까지.

 

#5. 어렵지 않다니까.

 

 두 번째 고민도 그렇게 해결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금전적인 문제와 행정 절차였다. 행정 절차야 차치하더라도 돈은 큰 문제가 되었다. 주말까지 일을 한다면 시간을 더 당길 수 있었다. 하지만 몸이 버티지 못할 것이었다. 비행기도 타기 전에 일터에서 쓰러져 실려 나갈 생각은 없었다.

 

 패스트푸드 가게 오픈 전 주아는 손을 분주하게 놀렸다. 필요한 경비는 200만 원으로 계산했다. 항공권과 체류비를 합한 금액이었다. 한 달에 60만 원에서 생활비를 빼면 40만 원이 남았다. 다섯 달이면 필요한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고작 다섯 달이면.

 

#6. 편도 티켓

 

 항공기는 천천히 활주로를 향해 움직였다. 기태가 그녀를 처음 만난 날처럼 그녀는 시선을 한곳에 두지 못했다. 기대에 부푼 그녀의 마음은 입꼬리를 밀어 올렸다. 이내 이륙 준비를 마친 항공기는 신호를 기다렸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고 다들 말했다. 그녀 자신조차 의구심을 품고 있던 일이었다. 절대 몸이 버텨내지 못하리라 생각했었다.

 

“짜식. 대견하다.”

 

 창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던 그녀는 제 머리를 쓰다듬었다. 순간 항공기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떨림은 온몸을 뒤흔들었다. 요란한 소리는 주위를 가득 채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제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그녀의 눈은 스르륵 감겼다.

 

#7. 아메리칸 드림

 

 절벽에서 발을 헛디딘 듯 아찔한 기분이었다. 깨어났을 때만 해도 잠시 존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온몸을 뒤덮은 식은땀은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수 없이 되뇄다. 주문처럼. 그러면 온 우주가 그녀의 바람을 듣고 소원을 들어주기라도 할 것처럼.

 

‘지금은 안돼. 조금만 더 버텨줘.’

 

 주문 탓이었을까 그녀는 무사히 JFK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짐을 찾는 과정에서도 딱히 어려움은 없었다. 지금은 막 ‘Times sq-42’ 역에 도착하는 지하철에서 내리기 위해 몸을 일으켜 세우는 중이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멈춰선 지하철은 문을 열어 그녀를 환영했다.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당당하게 개선문을 통과하듯 발걸음을 내디뎠다.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지나가는 사람들 몇몇이 눈을 흘겼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다시 볼 수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개찰구를 빠져나와 출구를 확인하는 중에도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지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저 걷는 것. 숨을 쉬고. 주위를 둘러보는 것마저 행복했다. 조금만 더 이 행복이 제 곁에 머물기를 원했다.

드디어 출구로 빠져나온 그녀 앞에는 빌딩이 빽빽하게 줄지어 서 있었다. 간간이 보이는 청명한 하늘에는 군데군데 뭉게구름이 둥둥 떠 있었다. 바람은 선선했다. 등에 멘 가방끈을 양손으로 힘껏 움켜쥔 그녀는 앞으로 향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한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 그녀와 목적지가 같은 모양이었다.

 

 곁으로는 많은 차와 함께 뉴욕의 명물이라는 노란 택시가 간간이 스쳐지나갔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 타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사실 타임스퀘어에 가보는 것 말고 아직 별다른 계획은 없었다.

걸음이 계속되는 사이 그녀는 다소 우중충한 건물 숲을 벗어나고 있었다. 이윽고 다양하게 빛나고 있는 광고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침내 멀지 않은 곳에서 꿈에 그리던 그곳을 발견했다. 요동치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어느새 그녀는 달리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싼 수많은 광고판. 그리고 여기저기서 모여든 다양한 사람들. 인터넷에서 보아왔던 그곳이 맞았다.

 

 잠시 걸음을 멈춘 채 숨을 고르는 사이 그녀는 생각했다. 왜 여기였을까. 예기치 못한 순간에 생을 마감해야 한다면 여기 뉴욕보다 멋진 곳은 더 많았을 텐데. 그리고 그녀는 떠올렸다. 오래된, 이제는 희미해진 기억. 그녀의 부모가 나눴던 마지막 대화였다.

 

“여보, 나 여행 가고 싶어.”
“지금 다녀오고 있는데?”
“해외.”
“지금은 주아 어려서 힘들잖아.”
“어머님께 맡기고 다녀올까? 표정 봐라. 농담이야 농담.”
“그래서 어디 가고 싶은데?”
“글쎄, 미국? 샌프란시스코도 좋고. 아니면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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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지증왕 3년, 오래전 내린 지독한 어둠이 채 가시기 전이었다. 나이든 기무해의 두 눈은 나라의 흥망성쇠를 논할 때만큼 흔들렸다.

 

“남색이라 했느냐!”
“아버지, 그는 내게 있어 봄날에 핀 꽃이며 여름에 맺힌 과실과 같습니다.”

 

 초연한 기태서는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하늘을 향한 곧게 뻗은 대나무처럼 당당했다.

 

“망측하구나, 망측해! 혹여나 했다. 혹여나. 내, 저 며늘아기가 가여워 씨받이를 들이자는 어른들의 고초도 견뎌냈건만. 뭐라? 남색? 하늘이 두렵지도 않은 것이냐!”
“하늘 아래 두 사람이 연정을 품은 것이 어찌 두렵다는 것입니까. 남자와 여자란 껍데기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늘그막에 얻은 독자였다. 가문의 대를 이어나갈 귀한 씨였다. 그런 씨가 썩어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코를 막지 않고선 역겨운 향을 이겨낼 수 없었다. 기무해의 눈초리는 싸늘하게 제 아들을 훑었다. 마립간을 보좌하며 자부심 하나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꺾이고 있었다.

 

“차라리, 차라리. 거짓을 고하거라. 며늘아기가 합방을 해서 손을 본다면 네 놈이 그놈과 무슨 짓을 벌이든지 상관 않겠다.”
“제 마음이 부인에게 닿지 않는 것을 어찌.”
“듣기 싫다!”

 

 화가 치민 기무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목적은 하나였다. 어떻게든 대를 이을 손을 보는 것이었다. 그것이면 가문에 먹칠한 아들놈이야 죽어도 그만이었다. 떨리는 손끝이 멈춘 곳은 마립간이 친히 하사한 검이었다. 날카로운 검날에 스치면 무엇이든 잘려나갈 것이었다. 그것이 끊을 수 없는 어떤 이를 향한 연정이라 해도.

 

“아버지. 어찌.”
“날 아버지라 부르지 마라. 네 놈 같은 자식을 이 가문에 들인 적 없다.”
“검으로 막을 수 있는 마음이라면 진즉 그리했을 것입니다. 잘라낼 수 있었다면 애초에 그리했을 것입니다. ”
“그만! 구역질 나는 그따위 말은 저승에 가서나 하거라!”

 

 날카로운 검의 끝은 기태서의 심장을 향했다. 미끄러져 들어간 검의 끝은 붉게 물든 채 그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쿵쾅거리던 심장 박동은 잦아들었다. 흔들리던 동공은 제 아비의 눈과 마주치자 떨림을 멈췄다. 당황한 기무해는 단단히 쥐었던 검의 손잡이를 놓치고 말았다. 동시에 죽음의 문턱에 들어선 아들은 맥없이 뒤로 넘어갔다. 이제야 서로 한발 물러났지만 어떤 것도 돌이킬 수 없었다. 

 

“흡.”

 

 창 아래 숨어 마음을 졸이던 기태서의 부인, 진여는 가까스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바짝 웅크렸다. 매일 밤 그녀를 품지 않는 그의 곁에서 했던 익숙한 자세였다. 하지만 이미 새어나간 소리를 돌이킬 수 없었다.

 

 바짝 긴장한 표정의 기무해는 숨을 헐떡이는 제 핏줄을 훑었다. 급한 대로 기태서의 가슴에 박힌 검을 꺼내 들었다. 시선은 창밖으로 향했다. 깊은 새벽이었다. 노비인 사잇놈에게 근처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 명한 터였다.

 

“사잇놈이냐.”

 

 떨리는 기무해의 목소리는 창밖을 향했다. 진여는 제 심장 소리가 새어나갈까 숨을 죽였다. 기무해는 미간을 찌푸린 채 창가로 다가섰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훑었다. 핏물이 떨어지는 검의 끝은 조심스레 창밖을 겨눴다. 그리고 그 끝이 굳게 닫힌 창을 밀어내기 전,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 

 

“예, 어르신. 부르셨습니까.”

 

 기무해는 창밖과 문밖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스스로 긴장한 탓이리라 마음을 다스렸다. 사잇놈이는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대꾸라도 하지 않으면 충직한 제 노비가 단숨에 방으로 들이닥치리라. 지금의 상황을 자신에게 추궁하기라도 한다면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잠시만 있어 보거라.”

 

 그의 목소리는 다급한 표정과는 사뭇 달랐다. 조금의 망설임이나 떨림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것이 그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오랜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이내 담담한 얼굴로 숨을 거둔 제 아들을 응시했다. 애도할 시간조차 사치였다. 제 손에 든 검을 다시 기태서의 심장에 밀어 넣었다. 맥빠진 기태서의 두 손은 되는대로 검 손잡이에 걸쳐놓았다. 그러고는 뒤로 털썩 넘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는 표정은 오랜 시간 단련된 듯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사잇놈이는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코끝을 찌른 피비린내에 미간을 찌푸렸다. 가문의 독자는 제 가슴에 스스로 검을 꽂은 채 누워있었다. 가문의 노예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기태서에게 달려간 그는 먼저 가슴을 살폈다. 삶의 기운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가슴은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다. 심지어 코끝에서도 어떤 생기조차 느낄 수 없었다. 그 또한 제 주인 곁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기무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르신…이게 무슨…”

 

 벌벌 떨고 있는 사잇놈과 달리 기무해는 구태의연했다. 분명하고 단호한 눈빛이었다. 오히려 차갑기까지 했다.

 

“불효다. 스스로 제 목숨을 끊는 것을 말릴 새도 없었다.”
“하지만 어찌.”
“네 놈이 이유까지 알려 드는 것이냐?”
“그것이 아니옵고.”
“순장을 치를 것이다.”

 

 한낱 노비인 사잇놈이도 알고 있었다. 마립간이 금한 일이었다. 그런 일이 제 주인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만히 두었다간 온 집안의 모든 노비의 숨이 끊어질지 몰랐다.

 

“하지만 어르신, 그것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게냐. 마립간이 금했다 말하고 싶은 것이냐. 네 놈에겐 내 말보다 마립간의 말이 우선한다는 것이냐. 하룻밤 새 네 놈의 주인이 누구인지 잊은 것이냐.”
“그것이 아니옵고.”
“그러면 네놈이 죽인 것이겠구나. 이 집안의 독자를.”
“아이고. 아닙니다.”

 

 사잇놈은 바닥에 이마를 대고 바짝 엎드렸다. 기무해는 그에게 눈을 흘기며 바닥을 털고 일어났다. 쉬쉬하긴 했지만 아들놈의 남색은 집안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차라리 이참에 모두 죽여 그 입을 막아버리는 것이 나았다. 

 

“당장 가서 마당으로 모든 사람을 불러 모으거라.”
“예, 어르신.”

 

 겁에 질린 사잇놈이는 제대로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중심을 잡지 못해 몇 번을 넘어졌다. 그 사이 창밖의 진여는 웅크렸던 몸을 폈다. 달아나야 했다. 이대로 허무하게 생을 마감할 수 없었다. 제가 아닌 누군가가 자신의 숨을 끊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다. 기무해가 말한 모든 사람 중 첫 번째는 자신일 것이 분명했기에.

 

 진여는 숨을 죽인 채 최대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작은 소리라도 냈다간 즉시 목이 떨어질 지 몰랐다. 마음이 급한 것은 사잇놈이도 마찬가지였다. 제 핏덩이라도 살려야 했다. 집안의 독자가 목숨을 잃은 것과 제 피붙이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는 부리나케 그곳을 떠났다. 그 사이 기무해는 재빨리 굳게 닫힌 창문을 열어젖혔다. 분명 사잇놈이가 아닌 다른 이가 내는 소리가 있었다.

 

 창 밑부터 주변까지 꼼꼼하게 모든 흔적을 살폈다. 제 거처에 이르는 길의 끝까지 그의 시선이 닿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맞은편 사랑채 사이로 난 좁다랗게 난 길, 그 끝에 누군가 있었다. 달빛에 드리운 그림자는 다급한 몸을 숨겼다. 기무해의 매서운 눈길에서 완전히 숨을 순 없었지만.

 

 다급해진 그는 기태서의 몸에 박아 놓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거처 밖으로 뛰쳐나왔다. 제 아들의 몸에 검을 찔러 넣을 때보다 가슴은 두근거렸다. 분명 치맛자락이었다. 곧 동이 틀 때가 되었으니 누군가 근처를 서성일 수도 있었다. 제 착각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확실히 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치맛자락이 사라진 방향은 제 아들 내외의 거처였다. 그곳부터 확인해볼 참이었다. 

 

 성큼성큼 옮기는 걸음으로 그는 단숨에 제 거처를 지나쳤다. 뿜어져 나온 입김은 그 뒤로 길게 흩날렸다. 하늘을 채우기 시작한 여명은 어느덧 아들 내외의 거처 앞에도 이르렀다. 채 마르지 않은 피는 뚝뚝 떨어지며 마당에 수를 놓았다. 숨을 고르던 기무해는 걸음을 멈춘 채 주위를 가만히 살폈다.

 

“아가 자느냐?”

 

 담벼락을 넘지 못한 소리는 주위를 울렸다. 나긋한 목소리는 잠에 빠지듯 듣는 이를 죽음으로 이끌 것이었다. 마루 밑에 몸을 숨긴 진여는 숨을 죽였다. 무슨 소리라도 낸다면 이대로 자신은 죽은 목숨이었다. 이른 새벽에 기무해가 제 거처를 찾는 일은 없었다. 찾는다 하여도 사잇놈이나 다른 몸종들이 올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 거처에 머물고 있어야 할 이는 진여, 자신뿐이라는 걸.

 

 기척이 없자 기무해는 조심스레 마루 위로 걸음을 옮겼다. 삐걱 거리는 소리조차 새벽에 잠길 정도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방문 앞에 이른 그는 차분하게 문고리를 당겼다. 그제야 모든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사잇놈이는 순장을 준비할 것이 아니라 진여부터 찾아야 했다. 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씩씩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여보…당신.”

 

 기무해의 부인은 차디찬 땅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초점 잃은 시선은 정처 없이 움직였다. 이 새벽에, 뒤집어진 눈으로 제 아들 내외의 거처에서 나오는 이를 곱게 볼 사람은 없었다. 더군다나 피 묻은 검이라니.

 

“부인… 우리 태서가...”
“태서가?”
“우리 아가, 아니 진여 그년이 찔러 죽인 것이 분명하오. 그년이 아이를 생산하지 못하는 것에 분을 품고 죽인 것이오. 제 서방이 품지 않는다고 어디 가서 몸을 굴린 것이지. 내 오늘 이 일대에 다 불을 지르더라도 그년을 찾아 꼭 죽일것이오.”
“태서가 죽다니요. 우리 며늘아기가 그랬다고요?”

 

 기무해의 부인은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곁으로 달려온 기무해는 곁에 검을 내팽개쳤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이는 부인뿐이었다. 혹여나 부인이 자신의 비밀 중 어떤 것이라도 알게 된다면 그걸로 자신의 생도 끝이었다. 아들을 죽인 것이든 며늘아기를 죽일 일이든 상관없었다. 제 머리만 떨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제 일가친척 모든 이의 숨이 끊어진다 해도 누구 하나 나서지 않을 것이었다. 배다른 형제라 해도 그녀는 마립간의 누이였다. 그는 온 신경을 집중해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랬다오. 부인. 꼭 그년을 찾아 우리 가문의 명예를 되찾으리다.”

 

 기무해가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는 사이 꺽꺽거리는 소리도 잦아들었다. 성난 바다처럼 거친 호흡도 잔잔해지고 있었다. 멍한 그녀의 두 눈은 텅 빈 제 아들 내외의 거처를 향했다. 손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어제의 흔적을 좇고 있었다. 두 번 다시 이곳에서 들리지 않을 웃음소리, 아장아장 걷던 그 어린 날의 시절까지. 그러다 그녀의 시선은 한곳에 머물렀다. 어린 기태서가 제 아비의 혼찌검을 피해 달아났던 그곳, 마루 아래 비좁은 틈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몸을 바짝 웅크린 진여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처음엔 그것이 짐승은 아닐까 했다. 그러나 마루를 벗어나 담벼락에 매달리는 그것은 분명 사람이었다. 어미가 제 아들을 죽인 이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그녀를 등진 기무해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늦은 밤 홀로 맹수를 만난 것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담벼락을 향해 검지를 곧게 뻗는 사이 진여는 이미 담벼락 뒤로 자취를 감췄다.

 

“여보!”
“무슨 일이오, 부인. 내 여기 있소.”
“진여! 그년이!”

 

 부인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 기무해는 그제야 사태를 파악했다.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든 그는 담벼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여인의 걸음으로 달아난다 한들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었다. 떠나는 길에 숨만 찰 뿐이었다. 가볍게 담을 넘은 그는 담벼락 주위를 살폈다. 녹지 않은 눈 위에 난 발자국은 자신을 진여에게 안내하고 있었다.

 

  하늘은 어느새 빛을 머금었다. 주위의 것들은 점점 분명해졌다. 나이가 들었다지만 기무해의 몸짓은 날랬다. 눈을 헤치는 발걸음 사이로 미처 떨어지지 못한 나뭇가지 위 눈발이 휘날렸다. 새벽의 고요함도 한 발치 물러섰다. 먼발치서 보이던 진여는 금세 지척거리에 다다라 있었다.

 

 거친 숨을 내뿜던 진여는 인기척에 잠시 고개를 뒤로 돌렸다. 제 지아비의 피가 묻은 검의 끝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기무해의 얼굴은 성난 짐승 그 이상이었다. 며칠간 굶주린 짐승의 얼굴도 그보다 소름 끼치지 않을 것이었다. 필사적으로 발을 내디뎠다. 쌓인 눈은 푹푹 들어가며 그녀의 간절함을 끌어당겼다. 옷가지 여기저기에 걸리는 나뭇가지 또한 그녀를 저지했다. 이제 기무해는 그녀의 등 바로 뒤에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조금도 벗어나거나 치우치지 않고 정확하게 그녀를 넘어뜨렸다.

 

“이게 다 무슨 짓이냐. 너나 나나 이런 고생 할 필요 없다. 아가야.”

 

 기무해의 가슴은 거친 숨에 연거푸 부풀어 올랐다. 검의 끝은 아스라이 퍼지는 입김을 지나쳤다.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한 채 몸만 돌려 뒷걸음질 치는 진여를 향했다. 

 

“듣기 싫소! 아가라 부르지도 마시오! 제 피붙이를 죽인 당신 같은 인간에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소!”
“피붙이라 부르지 말거라. 난 그런 자식 낳은 적 없다.”
“이러지 말고 그냥 보내 주시오. 어디든 가서 죽을 때까지 내 이름 한자 들리지 않게 하겠소. 흐르는 물이나 날아가는 새에게도 내 소식 들리지 않겠소.”
“너도 알지 않느냐. 아들놈, 그놈이 남색 한다는 사실을 감추려 했지만 감출 수 있었느냐.”

 

 진여는 계속 몸을 쉬지 않고 움직였고 그것은 기무해도 마찬가지였다. 조금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여기서 진여의 숨통을 끊고 순장으로 제 집안의 모든 종놈을 묻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누구도 다시는 그 일을 입에 올리지 못할 것이었다. 제 집안의 치욕은 그저 바람결에 날리는 한낱 소문에 불과하게 될 뿐이니까.

 

“그래서 죽인 것이오? 그래서? 숨통을 끊어 놓고 묻으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믿는 것입니까?”
“잘못 짚었다. 그것이 아니다. 그런 입방아찧기 좋은 이야기가 사라지겠느냐.”
“그러면 대체 무엇이오.”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눈 뜬 이를 장님으로 만든다. 귀 밝은 이를 귀머거리로 만들기도 한다. 하물며 호사가들을 벙어리로 만드는 일이 어렵겠느냐? 바로 그것이다.”

 

 순간 강직하고 대들보 같던 기무해가 그렇게 가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적어도 그의 삶엔 대의가 있다고 믿었다. 그가 내리는 모든 결단과 행하는 모든 일들에 이유가 있다고 말이다. 그 모든 것은 오로지 제 안위만을 위한 것이었다. 부인이나 피붙이에 관한 그 어떤 것도 없었다. 하물며 나라의 마립간을 위한 그 어떤 것도. 

 

“그리도 두려웠소? 기태서가 사내와 알몸을 비빈다는 사실이 아니라, 마립간 옆의 자리가 아까웠던 것 아니오?

 

 기무해의 동공은 심하게 흔들렸다.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미간을 구긴 후에도 분이 사그라지지 않는지 한참을 씩씩거렸다. 순간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아마 기태서를 찌를 때의 눈빛이 그러했을 것이다.

 

“네까짓 년. 죽어서 썩어 문드러져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을 년. 죽기 전에 내가 은혜를 베풀겠다. 태서놈한테 쌓인 원한 내가 풀어 주겠다. 그 많은 밤을 홀로 얼마나 저주를 퍼부었을꼬. 내가 그 한을 안다. 그래서 나한테 이리도 모질게 구는 것이겠지. 그 마음 내가 품어주겠다.”

 

 얼어붙은 진여는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처음부터 벙어리였는지 몰랐다. 벌린 입에선 애처로운 입김만 흘러나왔다. 어느새 그녀의 다리 끝에 무릎 꿇은 기무해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녀를 훑었다. 봉긋 솟아오른 가슴에서부터 치맛단 사이로 드러난 새하얀 발목까지. 그는 검을 내던진 후 그녀의 가녀린 발목을 움켜쥐었다. 애써 발버둥 쳤지만 주름진 악독한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오히려 기력만 쇠할 뿐이었다. 

 

“왜 그러느냐, 대체. 네년도 기태서 그놈처럼 아비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냐!”

 

 진여의 눈에선 급기야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더 가여웠다. 펼쳐진 치마 밑으로 드러난 속치마는 말려 올라가 허벅지까지 드러나 있었다. 하얗고 매끈한 허벅지를 보자 기무해의 아랫도리는 더 달아올랐다. 그는 내친김에 저고리에 손을 뻗었다. 이를 악문 진여는 간신히 그의 손을 잡아챘다. 당황한 그는 다짜고짜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맥없이 돌아간 그녀의 얼굴은 눈에 파묻혔다. 그 사이 기무해는 자신이 내던진 검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이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온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킨 그는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찢어진 입술에서는 붉은 피가 흘렀다. 흘러내린 피 아래로는 반쯤 드러난 가슴에 시선이 머물렀다. 매끈하고 찬 기운에 붉게 달아오른 것이 제 부인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버틴다고 달라질 것이 있는 줄 아느냐. 아리 그년, 그래 사잇놈이 짝. 그년은 처음부터 순순히 몸을 내어준 줄 아느냐. 그년도 처음엔 다 너와 같았다.”

 

 입꼬리가 올라간 그는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했다. 초점 잃은 두 눈은 허공을 향했다. 손은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어 지팡이로 삼았다.

 

“그걸 기태서 그 놈에게 들키지만 않았어도.” 

 

 진여의 시선은 제 가슴 어귀에 머물렀다. 기태서와 혼인한 그 날 밤, 그녀를 품는 대신 준 선물이었다. 이렇게 유품이 되리라고는 주던 그도 생각지 못했을 터였다. 단도에 아로새긴 꽃 한 송이는 그녀를 뜻한다 했다. 절대 이 단도를 쓸 일이 없게 지키겠노라 다짐했던 그였다.

 

 다짐도, 다짐했던 이도 곁에 없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기무해는 지척 거리에 있었다. 삶에 어떤 뜻이 있진 않았다.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기무해 같은 인간이 살아남아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의 검에 숨을 거두고 싶지도 않았다. 단도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시린 공기는 그녀의 온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끝은 정확했으며 민첩하기 그지없었다.

 

“악!”

 

 외마디 비명이 적막을 깼다. 기무해의 발등에서 흘러나온 피는 새하얀 주위를 물들였다. 검을 휘두를 엄두도 내지 못한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진여를 마주했다. 흘러내린 저고리를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인 그녀는 그의 발등에 박힌 단도를 단숨에 빼냈다.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 사이 단도의 끝은 그의 목을 향했다. 아마 잠시 후면 그의 얼굴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구겨지리라.

 

“푹.”

 

 단도가 목을 관통하는 소리보다는 깊은 소리였다. 기무해가 움켜쥔 검의 끝은 손쉽게 진여의 배를 관통했다. 등 뒤로 빠져나온 검에선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당황한 진여가 기무해를 노려보아도 달라질 건 없었다. 새어 나오기 시작한 피는 어느새 그녀의 온 몸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손에 힘이 풀린 그녀는 손에 쥐었던 단도를 떨어트렸다. 맥 없이 떨어진 단도가 바닥에 나뒹구는 사이 기무해는 검을 뽑아냈다. 그로 인해 벌어진 상처로 더 많은 피가 흘러나왔다. 배를 움켜쥔 진여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몸을 웅크렸다. 

 

 추위는 느낄 수 없었다. 지아비를 잃은 슬픔도 잠시였다. 그저 숨을 헐떡이며 기태서가 자신에게 남긴 환한 웃음을 떠올리는 것이 다였다. 기무해는 힐끗 그녀를 바라본 후 제 거처를 향해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진여는 혼잣말을 되뇌었다.

 

“꽃 같다 하지 않았소. 그대는 봄에 피는 꽃과 같지 않고, 여름에 무성한 풀 같지 않으며, 가을에 진 단풍 같지 않으니 그 아름다움을 무엇으로 말할까. 겨우내 홀로 고개를 드러낸 꽃같이 내게 제일가는 아름다움이라. 그대에게 연정을 두지 못하고 그대를 품지 못하니 내 평생을 속죄하며 살리다.”

 

 기태서가 혼인 첫날밤 그녀에게 해준 말이었다. 아득해지는 정신처럼 모든 감정과 기억도 흐릿해졌다. 뼛속까지 파고든 추위는 호흡마저 앗아가고 있었다. 흐리멍덩한 두 눈은 기무해의 발자취를 좇았다. 눈 위에 새겨진 발자국은 다른 흔적과 뒤섞여 혼잡했다. 그는 진여에게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멈춰있었다. 담벼락에 몸을 기댄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퍽!”

 

 크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기무해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사방으로 튄 피는 주위에 붉은 점을 찍었다. 사잇놈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담벼락을 단숨에 넘었다. 한 손에는 피로 붉게 물든 큼직한 돌이 들려 있었다. 기무해의 곁으로 다가온 그는 자세를 낮췄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것을 확인한 그는 주둥이를 파르르 떨리는 귓가에 갖다 댔다. 강하고 낮게 깔린 목소리엔 힘이 있었다.

 

“그 몹쓸 짓을 해놓고선? 아직까지 숨이 붙어 있는 것이오? 누가 죽을 짓을 했는가 말해보시오! 순장이라고 했소? 누가 누굴 죽이고 살린단 말이오? 아리 그것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쳤는데!”

 

 사잇놈이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죽여버렸어. 아리도, 마님도 다 죽여버렸어. 이제 어르신도.”
“푹.”

 

 기무해의 검은 정확하게 사잇놈이의 목을 찔렀다. 제 목을 움켜쥔 그는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황망한 그의 두 눈은 멀지 않은 곳을 향했다. 진여가 누워있는 그곳이었다. 그녀의 두 눈이 스르륵 감겼다. 잠은 그녀의 혼을 잡아당겼다. 퍼져 나간 붉은 혼은 사방을 물들였다. 그렇게 그녀는 하얀 눈 위에 피어오른 한 송이 붉은 꽃이 되었다.

 리스마스이브, 이현에게 있어 그다음 날은 12월 26일이었다. 오늘 잠들면 26일 아침까지 절대로 깨지 않을 계획이었다. 모든 준비는 완벽했다. 밤까지 새 눈이 벌건 그는 물끄러미 제 손에 휴대전화를 응시했다. 사람이 바글거리는 명동에 우두커니 서 있는 건 자신뿐이었다. 어서 자신을 구해줄 친구 놈의 연락만을 기다렸다. 그때,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미안.”

 

 이현이 기다린 첫마디와는 많이 달랐다. 아마도 ‘어디야’ 정도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는 침착하게 당황스러운 마음을 다스렸다.

 

“전화를 받자마자 사과라니. 미안해할 것 없어. 어째서 미안한 거야. 아직 일곱 시라고. 기다릴 수 있어.”
“하, 그게.”
“아니야. 듣고 싶지 않아.”
“정말 미안하다. 퇴근은 고사하고 내일도 출근하게 생겼다.”

 절망 섞인 한숨이 흘러나온 순간 이현은 깨달았다. 그 짧은 한숨은 친구의 긴 변명을 모두 대변하고 있었기에.

 

“이현아, 내가 어떻게든 가보려고 했는데.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다음에 내가 꼭 술”

 

 그는 심드렁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자신의 귀에서 뗐다. 친구가 술을 사겠다고 하는지 얻어먹겠다고 하는지 관심이 없었다. 이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곳에 멍청하게 혼자 서 있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이제 자신을 구원해줄 누군가도 없었다. 휴대전화 연락처를 뒤지던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엇을 하든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뿐이었다.

 

 지금 자신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한 개비의 담배였다. 그의 손은 분주하게 코트 안주머니를 뒤졌다. 익숙하게 담배를 하나 꺼내 문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눈을 지그시 감은 그는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다른 주머니를 뒤질 필요도 없었다. 친구보다 더 야속한 라이터는 따뜻한 방 안 책상 서랍 속에 고이 잠들어 있으리라.

 

 입에 문 담배를 손에 쥔 그는 애먼 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혀를 깨물어야 할까 싶었다. 하지만 그는 독립투사가 아니었다. 고백할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때, 거짓말처럼 다른 구원자가 나타났다. 그는 자신이 깨문 것이 혀가 아님을 신께 감사했다.

 

 몸에 딱 붙는 베이지색 코트는 빈틈없이 그녀의 몸을 따라 무릎 위까지 이어졌다. 옅은 갈색의 주름진 롱코트는 검정 레깅스가 둘러싼 매끈한 다리를 돋보이게 했다. 적당히 높은 검은 구두의 굽은 그녀의 자신감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의 시선은 코트 안으로 보이는 아이보리색 스웨터를 지나 그녀의 손에 머물렀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목표를 향해 달려들었다.

 

“저기요.”
“네?”

 

 어깨에 닿은 구불거리는 그녀의 머리칼은 부드러운 파도와 같았다. 파우더 향과 섞인 향긋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눈처럼 새하얗고 고운 얼굴에 박힌 두 눈동자는 보석이 따로 없었다. 주위의 모든 움직임은 느려졌다. 그의 눈은 그녀의 모든 것에 집중했다. 어느 것도 놓칠 수 없었다. 아니,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듯 이 모든 것은 자연스러웠다.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는 우주의 섭리였다. 그렇기에 그의 눈은 이끌리듯 그녀의 눈동자와 일직선 상에 위치했다.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아, 네. 그럼요.”

 

 라이터를 내미는 작고 앙증맞은 손끝에 이현의 손끝이 스쳤다. 추위에 얼어있던 몸이 떨린 것은 아니었다. 온몸에 퍼진 짜릿한 전율이 그의 몸을 춤추게 했으리라. 쿵쾅대는 심장은 그의 중심을 뒤흔들었다. 그렇지만 손에 든 라이터는 놓치지 않았다. 어쩌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수도 있었다. 

 

 이현은 담배에 불을 붙인 뒤 연기를 길게 빨아들였다. 빨아들인 연기는 입김에 섞여 허공에 흩날렸다. 그 사이 그녀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에게는 이 담배가 성냥팔이 소녀의 성냥처럼 느껴졌다. 한 개비의 담배를 모두 피우기 전까지 그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그의 존재를 귀찮게 여기는 듯했다.

 

 그렇지만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곳곳에선 캐롤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구원받은 그는 내일의 의미를 되새기고 싶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손엔 어떤 반지도 없음을 확인한 그였다. 모든 시도가 수포로 돌아간대도 상관없었다. 무슨 말이든 내뱉어야 했다. 

 

‘사랑한다고 말할까? 아니면 첫눈에 반했다고 해야 할까?’

 

 자극적이고 상투적인 표현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 사이 담배는 줄어들고 있었다. 그녀는 손목의 시계를 거듭 확인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담배도 그의 것과 마찬가지였다. 심지를 잃어가는 초처럼 곧 그 생명을 다하고 말리라.

 

“저기.”
“네?”

 찌푸린 미간조차 완벽했다. 태어나 세상에서 처음 제 어미를 마주한 짐승처럼 그녀의 얼굴은 그에게 각인되었다.

 

“술 한잔 사고 싶어요.”
“네?”

 

 조금 전보다 과장된 대답과 표정이었다. 멈춰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이제 자신의 담배는 한 모금 정도의 연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 뿐이었다.

 

“생각해봐요. 이 담배가 성냥이라고. 성냥팔이 소녀가 불이 꺼질 때까지 행복한 상상을 하잖아요. 그냥 나도 그런 거예요. 이렇게 멋진 여자를 앞에 두고, 그것도 크리스마스이브에. 그냥 지나친다면 그 쪽에게 지나친 실례 아닐까요? 그래서 나는 이 기회를 단지 상상만으로 남겨두고 싶진 않은 거예요.”

 

 적막이 흘렀다. 세상엔 단둘이 존재하는 것처럼 모든 소리가 차단됐다. 숨소리조차 희미했다. 그녀는 이현의 두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아무런 말도, 어떤 몸짓도 없이 그렇게 잠시 그를 살폈다. 이윽고 담배를 물어 연기를 깊게 빨아들인 그녀는 입을 동그랗게 말았다. 그 사이로 뿜어진 연기는 차가운 공기와 뒤섞였다. 동시에 그녀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화의 끈을 이었다.

 

“그런데요.”
“네?”
“담뱃불 꺼졌는데요.”
“그게 무슨?”
“내 말은. 그쪽 담뱃불 꺼졌으니까 이제 행복한 상상 끝 아니냐고요. 아 참. 그리고 성냥팔이 소녀는 결국 얼어 죽는데. 그쪽도 죽으려는 건 아니죠?”

 

 이현은 고개를 연신 좌우로 흔들었다. 그 사이 그녀의 담배꽁초는 땅바닥에 떨어졌다. 익숙한 듯 구두로 아직 꺼지지 않은 불을 비벼 끄던 그녀는 그를 곁눈질로 살폈다. 180 정도의 키에 잡티 하나 없는 하얀 얼굴이었다. 샌님 같기도 했으나 짙은 눈썹에 날카로운 눈매는 그런 생각을 애초에 할 수 없게 만들었다. 회색의 오버사이즈 코트는 그의 몸에 딱 맞게 떨어졌다. 코트 안으로 보이는 하얀 셔츠와 짙은 남색 니트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어딘가 모르게 달콤한 향이 나는 향수도 나쁘지 않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그녀는 시계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결심을 내린 듯 이현의 두 눈을 응시했다. 그 또한 그런 그녀를 위해 말을 이어나갔다.

 

“무슨 말 할지 알아요. 그러니까 잠깐만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만 기다려요. 죽을 생각은 없지만, 혹시나 내가 죽어도 절대 도의적인 책임은 묻지 않을게요. 불 빌려준 건 정말 고마워요.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내가 무슨 말을 할 것 같은데요?”
“그야, 당연히.”
“가요.”
“그렇죠. 제가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오늘 같은 날 애초에 밖에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웃음기를 머금은 그녀는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이어 자신의 검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닫았던 입을 열었다.

 

“아니, 같이 가자고요. 술 마신다고 바보.”
“네? 아, 정말요?”

 

 순간 너무 크게 튀어나온 이현의 목소리는 주위의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잠시였다. 행인들은 제 목적지를 향해 맹목적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그것과 상관없이 그의 두 볼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찬바람이 부는 것도 한몫을 했다. 그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몸을 바짝 웅크렸다. 그런다고 찬바람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그러고 있지 말고 좀 걸을까요?”
“그래요. 걸으면서 생각해요.”

 

 이내 둘은 인파 속으로 몸을 숨겼다. 둘을 쫓던 찬바람도 종적을 감췄다. 길거리를 가득 채운 인파 사이엔 온기가 가득했다. 몸이 제법 훈훈해지는 기분이었다. 그제야 잊고 있던 생각이 떠오른 이현은 입을 뗐다.    

 

“술은 잘 드세요? 무슨 술을 사야 하나? 와인 어때요?”
“처음 보는 여자한테 항상 그래요?”
“말을 못 거는 편은 아니지만, 술 사겠다고 해본 건 그쪽이 처음이에요.”
“내가 쉬워 보이나?”
“술 사겠다고 한 사람이 제가 처음은 아니죠?”
“뭐, 처음은 아니긴 한데.”
“오해는 말고 들어요. 그럴만해요.”
“그럴만하다는 게?”
“예쁘다고요. 그쪽.”
“오랜만에 듣네요. 그말.”
“왜요? 그런말 많이 들을 것 같은데.”
“아니에요. 진심 같으니까 일단 좋게 생각할게요.”
“아 참, 그런데 이름이 뭐예요? 계속 그쪽이라고 부를 순 없으니.”
“일단 우리 어디로 갈지 먼저 정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와인이 별로면? 칵테일은 어때요?”

 

 미간을 찌푸린 웃음기 가득한 얼굴의 그녀는 이현을 바라보았다. 이어 살짝 주먹 쥔 손으로 그의 팔을 툭 쳤다.

 

“소주나 사요.”
“그거면 되겠어요?”
“왜요? 뭐 사달라고 하면 다 사주시게요? 그냥 소주 사달라고 할 때 그걸로 사요. 나 술 세요.”

 

 이현이 대단한 것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함께 같은 목적지를 향해 걸으리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그였다. 그녀가 무엇을 원하든 그것은 온전히 그녀에게 달려있었다. 자신에게 속한 문제가 아니었다. 생각에 잠겨 잠시 말이 끊어진 사이에도 둘은 인파에 섞여 흘러갔다.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둘은 그랬다. 그때 그녀가 곧게 편 검지를 쭉 뻗었다.

 

“어? 포장마차다!”

 

 그녀가 가리킨 곳엔 분명 포장마차가 있었다. 입구에 다가선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이현도 그 옆에 멈춰서 잠시 그녀를 살폈다.

 

‘마음이 바뀐 건가?’

 

 그렇다 하더라도 나쁜 시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불순한 생각, 그런 생각의 범주가 어디까지인지는 규정할 수 없지만 절대 그럴 의도는 없었다. 단지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의 기회를 저버릴 수 없었을 뿐이었다. 생각에 잠긴 그를 그녀는 빤히 바라보았다.

 

“설마, 술 사줄 생각도 없으면서 사겠다고 한 건 아니죠?”
“네? 아니, 그쪽이 가만히 서서 안 들어가길래.”
“잠시 휴대전화 좀 확인한다고 그랬어요. 들어가요.”

 

 들어선 포장마차 안은 길 만큼이나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둘이 오기만을 기다린 듯 자리가 딱 하나 남아 있었다. 빼앗을 누군가 오는 것도 아닌데 이현은 부리나케 자리를 선점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그녀도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다. 

 

“안주는 뭐가 좋겠어요?”

 

 그녀가 자리에 앉는 사이 그가 물었다. 그녀는 그런 그의 질문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여기 참이슬 두 병 먼저 주세요!”

 

 그제야 이현이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는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 미안해요. 안주는 그쪽 먹고 싶은 거로 해요. 난 아무래도 괜찮으니까.”

 

 가만히 눈치를 살피던 그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메뉴에 대한 고민도 있었지만, 그보다 달라진 그녀의 표정이 주된 원인이었다. 사실, 달라졌다기보다는 처음부터 그랬을 수도 있었다. 그걸 지금에서야 알아챈 것일 수도 있었다. 모르는 사람과 술자리를 하게 돼서 긴장한 표정과는 달랐다. 둘 사이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막 도착한 소주는 분위기를 뒤섞었다. 소주병을 집어 든 그녀는 웃음기 띈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제 물잔에 소주를 채우며 끊어진 대화를 이었다.

 

“그쪽도 물잔?”
“아, 저는”
“그쪽도 그냥 물잔에 마셔요. 분위기 깨지 말고.”

 

 이현의 잔까지 채운 그녀는 용도를 다한 빈 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어 술이 가득 찬 물잔을 집어 들었다. 그도 마지못해 잔을 들었다. 서로 잔을 살짝 부딪친 후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소주를 조금 들이켰다. 알싸한 알코올 향이 식도를 감쌌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맛이었다. 그 사이 그녀는 제 잔의 소주를 모두 비웠다. 

 

“에이, 첫 잔은 원샷이지.”

 

 당황한 그가 내려놓던 잔을 다시 입으로 가져가자 더 당황한 그녀가 그를 제지했다.

 

“농담이에요. 농담.”
“그런데 무슨 일 있어요?”

 

 손에 턱을 괸 그녀는 그의 말에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아랫입술까지 깨문 그녀는 미간까지 찌푸렸다. 그녀의 시선은 테이블 위에 소주병에 머물렀다. 그리고 손이 소주병에 닿기 전에 그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이번엔 그의 손이 그녀의 물잔에 소주를 채웠다. 소주가 물잔에 가득 차자 그는 고개를 돌렸다.

 

“아주머니, 여기 어묵탕 하나 주세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그녀의 물잔이 텅 빈것은. 대신 그만큼 그녀의 볼은 붉은 빛을 띠었다. 취기가 오른 듯했다. 눈을 지그시 감은 그녀는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아, 쓰다. 있잖아요. 아니 있잖아. 처음 만난 사람한테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괜찮아요. 어차피 오늘 시간도 많은데요.”
“사실 오늘, 헤어지려고 온 건데.”
“헤어지다니? 누구랑?”
“남편은 아닐 거잖아. 당연히 남자친구지.”
“그런데 헤어지려고 여길 와? 명동까지? 이브에?”
“약속했거든.”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테이블 위에 잘 깎인 오이를 하나 집어 들었다. 끝을 조금 베어 문 그녀는 생각을 정리하듯 오이를 빙빙 돌렸다. 이어 허공에 오이가 멈추자 그녀가 벌어진 대화의 틈을 메웠다.

 

“약속했어. 우리가 헤어지면. 아니 그때가 되면. 꼭 명동에서 보기로. 그래서 기다린 거야.”

 

 이현은 그제야 그녀의 모든 행동이 이해가 됐다. 계속해서 시계를 들여다보던 그녀의 모습. 그리고 포장마차 앞에서 망설이던 모습까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자신이 이용당한 것이었다. 둘의 이별식에 자신은 들러리일 뿐이었다. 그저 희생양에 불과했다. 불쾌한 기분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결심이 선 그는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술은 잘 마셨지? 나도 잘 샀어.”
“가지 마.”
“사실 난 고마웠어. 좋은 추억이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 어쩌면 정말 어쩌면, 더 나아가 더 나은 관계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그러니까 가지 마. 잠시만 그냥 그렇게 내 앞에 있어 줘. 그렇지 않으면 내가 오늘 너무 비참할 것 같아서 그래.”

 

 그녀의 눈엔 어느덧 눈물이 글썽거렸다. 이현은 깊은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테이블 위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어묵탕이 올라와 있었다. 둘 사이의 온도는 그보단 차가웠다. 그는 말없이 제 앞의 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런다고 답답한 기분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리가 필요했다. 순식간에 꼬여버린 실타래 같은 지금의 상황을 풀어나가야 했다. 그녀가 떨어지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치는 사이 그가 굳게 닫았던 입을 열었다.

 

“그래. 좋다. 뭐가 됐든. 그래서. 넌 도대체 이름이 뭐야.”
“시아. 이시아.”
“나이는?”
“스물다섯.”
“그런데 왜 반말해?”
“아니, 그게 있잖아요. 오빠는 몇 살인데요?”
“스물다섯. 이름은 정이현.”
“스물다섯이면, 나랑 동갑인데? 너는 왜 반말했어?”
“네가 반말하길래. 오빠는 듣기 좋네. 그래서 왜 헤어지려는 건데? 남자가 바람이라도 피웠어?”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변했대.”
“어떻게 너처럼 예쁜 여자를 두고? 그 사람 정신이 좀 이상한 거 아니야?”

 

 시아는 코웃음을 치며 테이블 위의 소주병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물잔을 바라보다 말고 소주잔에 남은 소주를 채웠다. 이미 비어 있는 그의 잔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이 변하면 정신이 이상한 거니?”
“그런 건 아니지만.”
“뜨거울 때도 차가울 때도 있지. 변하는 건 이상한 게 아니야. 뜨거웠던 시절에. 서로가 바라만 봐도 웃음이 났던 시절에. 이제 와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 헤어지는 마당에.”
“도대체 난 이해를 못하겠네. 네 말처럼 헤어지는 마당에, 넌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데?”
“사랑했으니까. 진심이었으니까. 그 사람이 날 사랑하지 않았어도. 진심이었다면 우리가 헤어지는 순간에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믿었어.”

 

 이현은 제 앞의 술잔을 바라보다 술병에 남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고는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술병을 내려놓았다. 얼얼한 입은 짭조름한 어묵 국물이 달래주었다. 도무지 답답한 가슴은 달랠 길이 없었다. 쓴웃음을 지은 그는 카운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모,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난 이제 괜찮은데.”
“이건 내가 마실 거야. 그렇다고 마시지 말라는 건 아니야. 그래서 이게 최선이라는 거야? 헤어지려고 나왔다가 모르는 남자랑 술이나 마시고 있는 게?”
“최악은 아니라고 생각해. 이게 최악이라면 너에게나 나에게나 너무 끔찍하지 않겠니?”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그 사람이 지금 네가 이러는 걸. 내 말은 그러니까, 이런 시간과 이런 노력을 그 사람은 조금도 알지 못할 텐데. 무슨 의미가 있냐는 거야. 헤어지면 그냥 끝인 거야.”
“끝은 끝이지. 그냥 난 그래. 확인하고 싶었어. 우리가 어떻게 시작했고, 어떻게 사랑했고, 어떻게 이렇게 됐는지. 잘잘못을 가리자는 건 아니었어.”
“하나만 묻자. 그 사람. 사랑해?”
“아마도. 그런 것 같아.”

 

 불확실함. 정의되지 않은 상태.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할 애매한 감정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저기, 시아야.”
“응?”
“난 그 사람이 얼마나 잘난 지 모르겠어.”
“사진 보여줄까? 아, 참. 그건 실례다. 미안.”
“그래. 그건 좀 심했어.”

 

 이현은 서로의 빈 술잔을 채웠다. 시아는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마주친 그의 눈동자 안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거리가 있어 생각만큼 선명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그를 향해 조금 기울였다. 당황한 그가 몸을 뒤로 빼기 전에 그녀는 분명히 알았다. 슬픔에 잠겨 누구도 건져낼 수 없는 최악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혼잣말처럼 절망감을 되뇌었다.

 

“이별이 시작처럼 쉬우면 얼마나 좋을까. 절벽에서 뛰어내리듯 이별도 단숨에 끝났으면 좋겠어. 왜 이별은 시작처럼 간단하지 않을까.”
“글쎄. 그게 사랑의 기본적인 성향 아닐까. 아무것도 서로 사이에 쌓인 게 없을 땐 돌아서면 끝이겠지. 그런 이별은 시작보다 오히려 쉬울지도 몰라. 쌓인 게 많으면, 그게 서로에 대한 비난과 미움이라고 해도 그걸 들어낸다는 건 생각만 해도.”
“난 이별이 꽤 낭만적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별은 태생이 잔인해. 절대 그럴 수 없어.”
“헤어져도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잖아?”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사랑했던 사람이 되고 그게 다시 친구가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을 내 친구라 소개한다. 이게 낭만적인가?”
“친구와 사랑해도 헤어지면 그냥 친구인 거잖아? 크게 다르지 않잖아. 모르는 사람이었든 아는 사람이었든 결과적으로는.”
“어떤 사랑이 되었든 나에게는 추억이고 좋은 기억일 수 있지만 새로운 사람에게 그런 것들은 뭐가 될까?”

 

 시아는 그가 채워 놓은 술잔을 집어 들어 가만히 눈을 맞췄다. 그 안에 담겨 흔들리는 술이 지금 자신의 모습 같았다. 마음은 좀처럼 가만히 있지 않았다. 출렁이고 요동치며 모든 것을 흐릿하게 했다. 분명한 건 있었다. 잔 너머에 그. 이현은 그윽한 눈길로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단숨에 잔을 비운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기다란 오이 하나를 입안에 욱여넣었다. 그 사이 그녀가 적막을 깼다.

 

“이기적인 걸까? 나 이기적인가? 꼴불견? 어머, 나 너무 재수 없었지.”
“조금?”
“솔직하게 말해주니 고맙네. 그런데 너는 왜 오늘 같은 날 혼자야?”
“조금 전까지는 그랬지. 지금은 너랑 있지만.”

 

  그녀는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그의 빈 잔을 채웠다. 웃음도 술도 자신의 마음을 채울 순 없었다. 정신없이 떠들고 취해도 텁텁한 기분은 그대로였다. 그녀는 이내 초점 잃은 눈으로 그를 마주했다. 이현은 천천히 그런 그녀를 살폈다. 기분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나갈까?”
“응?”
“가자. 나가서 바람 좀 쐬자.”

 

 이현은 고갯짓으로 정확한 의사를 전달했다. 그녀는 입을 빼죽 내밀고 잠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계산하는 사이에도 말이다. 그녀의 시선은 그에게 머물렀다. 이제 곧 그가 떠나면 다시 현실에 남겨질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를 영원히 자신의 곁에 붙잡아둘 수는 없었다. 마음이 복잡해진 그녀는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감싸자 머리칼이 쭈뼛쭈뼛 섰다. 인파가 뜸한 구석으로 자리를 옮긴 그녀는 몸을 웅크렸다. 그런다고 추위를 피할 수는 없었다. 코앞에 다가온 또 다른 이별처럼. 몸을 부르르 떨며 담배 한 대 꺼내는 사이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 옆에 선 그도 담배를 꺼내 물었다. 시아는 제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 말고 이현에게 라이터를 건넸다. 그를 시작으로 그녀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란히 선 둘이 연기를 빨아들여 내뱉는 사이 수많은 인파가 그 앞으로 스쳐 지나갔다. 연기는 그보다 빨리 허공으로 자취를 감췄다. 물끄러미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그녀가 운을 뗐다.

 

“이대로 끝인 거겠지?”
“뭐가? 남자친구랑?”
“응.”
“여기엔 헤어지는 거 알고 나온 사람. 헤어지는 거 알고 나오지 않은 사람이 있으니 끝인 거겠지. 어느 정도 결심이 섰으니 나온 거 아니야?”
“그랬지.”
“그래. 오늘은 조금 슬픔에 잠겨 있어도 괜찮아. 충분히 경험하고 빠지지 않으면 괜히 미련만 남는다.”
“큰 이별 겪어본 사람 같네.”
“이별해 보지 않은 적은 없지만 뜨거운 적은 없어서 어떤 기분일지는 모르겠어. 나만 그랬던 걸 수도 있지. 한번 그랬던 적이 있어. 내가 미안해했을 때.”
“미안해했을 때?”
“걔가 그랬거든. 미안해하지 말라고.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내버려 두지 않으면. 그래서 충분히 아파보지 않으면 제대로 이별할 수 없는 거라고.”
“멋진 여자친구였네.”

 

 쓴웃음을 지은 이현은 절반 정도 타다 담은 담배 재를 툭 털었다. 그러고는 연기를 쭉 빨아들였다. 그때 문득 이야기 하나가 생각났다. 연기를 허공에 흩뿌린 그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취기 때문이었다. 

 

“있잖아. 시아야, 사실 고백할 게 하나 있는데.”
“뭔데?”
“왜 아까 이야기가 떠오르는지는 모르겠는데. 이게 지금 내가 피우고 있는 담배가 돛대거든. 그런데 우리가 아까 성냥팔이 소녀 이야기를 잠깐 했잖아. 그 소녀가 마지막 성냥으로 행복한 상상에 빠져서 죽잖아? 내가 죽겠다는 건 아니고. 마지막 소원이 하나 있어.”

 

 피식 웃은 그녀는 꺼져가는 담뱃불을 응시했다. 좀처럼 꺼지지 않는 불을 바라보며 궁금한 듯 그의 입에 집중했다. 그러고는 대답을 재촉했다.

 

“들어나 보자.”
“바다 보러 갈래?”
“지금?”
“응.”

 

 생각보다 담뱃불은 쉬이 꺼지지 않았다. 왜 망설이고 있는지 알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담배 연기를 빨아들인 그녀는 천천히 다시 내뱉었다. 정리되지 않는 마음처럼 연기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답보상태인 지금의 상황을 정리한 것은 아마 취기였을 것이다. 아마.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난.”
“별수 없지. 내가 또 괜한 말을 꺼냈네. 이제 못 볼 거라고 생각하니까 막차를 눈앞에서 놓치는 기분이었어. 어쩌면 내 인생에서 두 번 다시 겪을 수 없는 일일 텐데. 이렇게 떠나보내기엔 너무 아쉬웠거든. 물론 내가 조금 너와 이제 전 남자친구? 아무튼 그사이에 끼어버린 느낌은 있지만.”
“아니, 내 말은. 오늘은 안 되겠다고.”
“오늘은 안 되겠다니?”
“이제 전 남자친구랑 헤어졌는데. 이런 기분으로 어떤 추억이든 만들고 싶지 않아. 물론 너와 마주친 건 꽤 괜찮은 사고였어. 어쨋든 네 말대로 나도 조금은 이별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 그래서.”
“그래서?”
“내년, 오늘, 우리가 만난 그 시간 그곳에서 만나자. 그리고 그때 가자. 바다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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