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 소리가 울리면

 요즘 같아서는 각종 청구서에 가슴이 철렁할 일뿐, 가슴 뛸 일이 별로 없다. 하지만, 벨 소리가 울리는 날에는 죽은 줄 알았던 심장이 다시 뛰고야 마는 것이다. 바로 택배 박스를 손에 든 택배 기사님에 의해서 말이다. 우리는 마치 파블로프의 개처럼, 그렇게 존재한다.


기별

 게임을 좋아하는 나에게는 매년 돌아오는 생일은 타이틀을 두 개 정도 부담 없이 구매할 수 없는 좋은 기회이다. 하나는 아내로부터. 하나는 형으로부터.

 

 하지만 불행하게도 올 초엔, PS4뿐만 아니라 닌텐도에도 주목할 만한 신작은 없었다. 웬만한 타이틀은 다 들고 있지만 손이 가지 않아 먼지만 쌓이고 있다. 아내의 임신으로 무언가 조금 더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사촌 동생에게 연락이 왔다.

 

"오빠, 생일 선물 뭐 받을래?"

 

 순간 굳어 있던 두뇌는 빠르게 움직였다. 게임 타이틀을 고를 때처럼 빈틈이 없었다. 두 눈은 쉴 새 없이 집을 채워 놓을 아이템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그 보드게임이 생각났다.

 

"부루마불."

 

부루마불 클래식

실종

 택배가 온다는 주말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배송 조회를 눌러본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경기도 안양으로 와야 할 택배가 광주로 가고 있었다. 경기도 광주 말고, 전라도 광주 말이다. 사촌 동생에게 사진을 보낸 뒤 허탈하게 웃으며 물었다.

 

"이거 맞아?"

 

택배는 광주광역시를 향해 간다.

 사촌 동생이 전전긍긍하며 판매자에게 연락을 시도했지만 소용없었다. 대신 구매자들의 성토장이 된 QnA 게시판만 확인했을 뿐이었다. 나는 오래된 기억을 더듬었다. 결혼 전, 언젠가 보냈던 명절 선물이 송장번호가 뒤바뀐 사실을 기억해낸 것이다. 방법은 없었다. 우선 기다려보는 수밖에.

지금 알고 있는 사실을 그때 알았더라면

*작성자 주: 송장번호가 뒤바뀌면 택배가 엉뚱한 주소로 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물건은 제대로 간다. 배송정보만 뒤바뀌어 보일 뿐이다. 전라도 광주의 구매자는 경기도 안양으로 가는 자신의 택배를 안타까운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기척

 그날 저녁.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눈앞에 들어온 택배 상자가 하나 보였다. 눈대중으로 박스 크기를 가늠해보니 기다리던 그 택배가 맞았다. 다른 택배일 리 없었다.

이게 뭐라고 설레인단 말인가!?

 어린 시절, 집에 부루마블 클래식이 있는 친구를 그렇게 부러워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우리에게 그것이 생겼다. 오늘만큼은 세상 어떤 누구도 부럽지 않았다.

서울 구경

 우리 부부는 바로 판을 벌였다.

부루마불 클래식의 게임 설명서
부루마불 클래식의 돈과 게임말, 건물, 황금열쇠, 땅 카드
부루마불 클래식 게임 준비 - 땅 카드 꽂는 판에 소음방지 매트가 뚫릴까봐 깐 해커스 오픽(*미안)
부루마불 게임 말 - 출발 전

 나는 세계를 돌며 각지를 매입하고 호텔을 올렸다. 아내는 씩씩대며 국내의 관광 명소를 매입하는데 그쳤다. 그것도 잠시, 일은 황금열쇠의 저주에서 시작되었다.

 

들어는 보았는가?

반액 대매출’

‘건물 유지비 지불’

*작성자 주: 반액 대매출 - 본인이 들고 있는 땅 중 가장 비싼 곳을 반값으로 판다. 건물 유지비 지불 - 본인이 들고 있는 땅의 건물에 대해 일정 비율로 금액을 지불한다. 호텔이 제일 비싸다.

 

 황금열쇠는 나에겐 반액 대매출 두 번과 수많은 호텔에 대한 건물 유지비 지불을 한 번 요구했다. 건실한 사업가인 나는 대규모 매각을 단행하며 재기를 노렸다. 아내가 들고 있던 우대권도 개의치 않았다. 처음 서울 구경을 할 때만 해도 버티면 되겠지라고 생각했다.

 

 이어 두 번째 서울 구경을 할 때 생각했다.

 

‘뭐 이딴 게임이 다 있지?’

 

 나의 유년기, 군대 시절을 함께 했던 그 게임이었다. 추억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주사위를 던졌다. 내가 들고 있던 거의 모든 땅은 이미 아내의 차지가 되어있었다. 반환점을 앞에 둔 나는 아내에게 말했다.

 

"이번에 서울 또 걸리면 그만하자.’
"그래"

 

 싱긋 웃는 아내의 얼굴을 보며 나는 설마 하며 주사위를 던졌다. 탁 소리를 내며 뱅그르르 돌다 멈춘 주사위는, 나에게 세 번째 서울 구경을 시켜주었다.

패배 후에 남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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