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를 위한 키보드.

 

 키보드에 조예가 있는 편은 아니지만 십 년 넘게 현역으로 일하며 키보드를 두드리며 깨달은 사실이 있다. 결국은 취향 또는 얼마나 편안함을 주는지 정도가 선택의 이유가 될 것이다.


편안함의 문제

 

 키보드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된 시기는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하기 1년 전쯤인 것 같다. 사실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한 적은 몇 번 있었고 실제로 결심했을 때마다 이직 직전까지 갔었지만. 이유야 어쨌든 회사에 남는 선택을 했고 그즈음에 손 뼈의 통증이 심해졌다.

 책상에 댄 손바닥 끝에 힘을 주는 것이 문제였다. 마우스야 손목 받침대가 보호해 준다지만 키보드를 쓸 때는 영락 없이 통증이 찾아왔다. 이러다간 일을 그만둔 후에 글을 쓰는 취미마저 포기해야 할까 덜컥 겁이 났다. 결론은 편안한 키보드를 찾는 것. 그중에서 물망에 오른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Kinesis, 다른 하나는 마이크로소프트의 인체 공학 키보드 마우스 세트였다. 오랜 시간 고민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독보적인 디자인과 활용도가 높아 보이는 매크로 기능이 눈길을 끌었지만 50만 원 대의 가격이 큰 걸림돌이었다. 50만 원이면 마이크로소프트의 키보드 마우스 세트를 몇 개는 더 구매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렇게 산 키보드는 퇴사 전까지 손 뼈의 통증을 줄이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취향의 문제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퇴사를 결심하고 실행에 옮긴 후 다시 회사에 복귀하기까지 1년의 시간이 흘렀다. 키보드는 1년을 쉬었지만 세월의 흔적은 피해 가지 못했다. 손목 부분에 묻은 이물질을 벗겨내려 갖은 시도를 했지만 노력하면 할수록 코팅이 벗겨지며 더욱 지저분해질 뿐이었다.

 같은 키보드를 다시 사야 하나 고민하던 와중에 관심이 있던 기계식 키보드를 찾아보았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Varmil의 기계식 키보드가 좋다는 의견이 우세적이었다. 그리고 마음에 든 키보드는 노르웨이의 산악 지대를 형상화했다는 Varmilo MA108M summit edition 이었다.

키보드의 링크를 보내며 아내에게 넌지시 말을 꺼내보았다.

 

“이거 어때?”
"하나 사."
"그런데 이거 비싸서.

 십만 원도 비싸다고 생각하는데 20만 원을 호가하는 키보드는 말을 꺼내면서도 부담이었다. 20만 원의 값어치를 할지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아내의 말은 나를 완전하게, 그리고 불가역적으로 설득시켰다.

“출근해서 퇴근할 때까지 여덟 시간 동안 키보드 두들기는데 좋은 거 써야지.”

 

키보드 칠 때는 타다닥 소리가 나야지. 그리고 숫자 키는 없어도 되는 거 아니야?

 

 승인이 됐으니 이제 실제 결제할 키보드를 고를 차례였다. 여러 타입을 고민했지만 스스로가 업무 중에 키보드 소리가 요란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기계식 키보드를 쓰는 매력이 줄어들긴 하겠지만 저소음 적축은 조용한 업무 환경을 제공할 최상의 선택지였다. 그리고 맞이한 다음의 문제는 가장 큰 고민을 안겨주었다.

 텐키리스 디자인이 더 좋다고 느꼈지만 한 번씩 계산기에 숫자를 넣고 아이피를 치거나 할 때 텐 키 부분이 없다면 괜한 불편함을 초래할 것이라 생각했다. 가격 차이가 크게 나는 것도 아니었고 텐 키 부분을 별도로 사려면 그것도 꽤 비용을 치러야 했다.

 그다음은 각종 키를 극단적으로 줄인 68key가 눈길을 끌었다. 맥을 사용하며 이런저런 키 조합에 익숙해져 있지만 완전하게 새로운 형태의 키보드에 적응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것 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결론은 익숙한 것을 선택하고 새로운 것은 중고로 체험해보자. 그것도 아니라면 시간이 좀 지난 후에 새로운 시도를 해보자 하는 것이었다.


이 맛에 기계식 키보드 쓰지.

 

 꼼꼼하게 싸여 도착한 키보드의 무게는 꽤 묵직했다.

러시아 인형인 마트료시카처럼 박스 안의 박스 안의 박스를 경험하게 해준다.

박스의 감성만 따지면 애플 버금간다.
키보드로 할 수 있는 예술이 뭔지 기대하게 만든다.
추가 키 캡도 있다.
구성은 단출하다. 딱딱한 커버로 키가 눌리지 않게 보호한 점에서 뜻하지 않은 감동을 받았다.

 푹푹 들어가는 느낌의 타건감은 기계식 키보드를 한 번도 써보지 않은 나에게 이질감을 느끼게 했지만 곧 익숙해지리라 생각했다.

멀리서 보면 노르웨이의 설원이 그려진다. 하지만 멀리서 보려는 목적으로 산 건 아니다.

 백팩에 넣어 회사 사무실 책상 위에 올려 두고 나니 벌써 다른 욕심이 샘솟는다. 개발에 열심히 매진해야겠다는 생각보다 하루빨리 다른 키보드를 몇 개 장만해서 그날 그날 바꿔가며 써야겠다는 생각 말이다.

물론 그것도 아내가 다시 허락해 줘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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