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즐기는 아빠들이
남자아이가 자식으로 있다면 한 번쯤 생각해 봤을 꿈.
아이가 크면 함께 플스 패드를 잡고
게임 생활을 즐겨야지.

나는 그보다 멀리를 내다보며,
'손가락 관절염이 오기 전까지
패드를 손에서 놓지 않겠다'
수없이 되뇐다.

물론 그 어떤 말도
생일을 무기로 구매에 이른 PS VR2에 대한
변명은 되지 않는다.


1. 천운 혹은 마케팅에 속은 자

 PS4 Pro 구매 대란부터 PS5 구매에 이르기까지 언제부터인가 구매권을 추첨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와중에도 운은 언제나 내 편이었다. 혹은 지출의 신이 나와 함께 하고 있던 것일 수도.

 

 PS VR2도 다르지 않았다. 개발 초기 단계부터 SONY 마케팅의 노예가 된 나는 출시만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아이가 걷기 시작했고 거실의 모든 게이밍 기기는 방안의 책상 위로 거처를 옮기게 되었다. TV로 즐기던 게임을 작디작은 모니터로 하려다 보니 그 모습이 그렇게 안쓰러웠나 보다.

 

 물론 시간이 지나 아이가 자신의 장난감에 집중하기 시작하며 일부 기기를 거실로 옮겼다. 그렇게 육아와 일 사이의 틈에 게임을 채워 넣던 일상이 반복되던 어느 날이었다. 지나가는 말로 아내에게 의사를 타진했다.

 

“VR2 나온다는데 이걸로 게임하면 TV도 필요 없고 내 생일 선물로 사면 어떨까.”

“그래?”

 

아내의 대답이 이어진 그 순간, 나의 오감은 어느 때보다 민감했고 두뇌는 AI처럼 빠르게 말의 톤과 표정을 분석하고 있었다.

 

“근데 좀 비쌀 거 같긴 한데.”
“뭐 일한다고 고생하는데. 그리고 난 TV도 잘 안 보고 어차피 거실에서 TV를 없앴으면 하니까.”

 

최근에 큰 잘못을 했는지 곰곰이 지난 나의 하루하루를 되짚어 보았다. 아니면 아내가 원하는 큰 무언가가 있었을까?

당첨이라는데 출시일을 지나서 보니 온라인에서 구매 가능한 걸 보니 예상보다 사전 구매가 적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나 구매권 추첨 일이 되어 구매권 추첨에 성공하고 구매에 이르기까지, 그 질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얻지 못했다. 다만 정말로 거실에서 TV를 치워버리고 싶다는 순수한 의도가 있었으리라 어림 짐작할 뿐이다.

언제 오는 겁니까
 

 

2. 조상님이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고 했는데

아침부터 이런 연락은 설레게 한다.

 요즘 아이가 택배 상자를 보면 공룡알이 들어 있다면서 먼저 뜯는 통에 택배가 도착한다는 알림을 받은 순간부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밀린 일을 내일의 나에게 미뤄두고 퇴근을 선택한 나를 위해 아내는 아이의 손길로부터 택배 상자를 지켜주었다.

실물 영접.
 

 기대에 부풀어 택배 상자에서 VR2 박스를 꺼내 올린 순간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애플 급의 감성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이전 플스 포장들에서 느껴온 그 기분 그대로를 느꼈다. 싸구려 포장. 봉인 씰도 아닌 박스테이프 같은 테이프가 떡하니 붙어있었다. 제품을 지켜주는 박스 내부는 여전히 몇 만 원짜리 제품의 포장인 듯 싸구려 티가 넘쳤다. VR2 기기와 새 패드의 감동을 반감시키는 SONY의 커다란 선물이었다.

봉인 씰부터 원가 절감의 흔적이 느껴진다.
 
호라이즌이라 참는다.
박스도 원가절감에 충실한 게 느껴진다.
문제의 길고 긴 USB C 연결선이 보인다. 하지만 실 플레이 시에는 거의 신경 쓰지 못할 정도다.
플스 여정 처음으로 받아본 디지털 구매 쿠폰. 아쉬움이 남지만 그래도 구매한 것에 만족.

 그래도 오랜 시간의 기다림을 단순히 박스 하나로 망치고 싶지 않았다. 서둘러 플스에 VR2를 연결하고 ‘콜 오브 마운틴’을 영접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플스4에서 플스4 Pro로 이전, 그리고 플스4 Pro에서 플스 5로의 이전이 그러했듯 모든 과정이 쉬웠다.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그냥 꽂고 켜면 TV 화면에서 가이드 해준다.
 
드디어 시작이다.

3. 멀미와 인지부조화, 그리고 부작용

VR2 기기를 착용하고 눈앞에 처음 나타난 화면을 마주했을 때 나의 반응은 이랬다.

‘음…’

하지만 이내 내 반응은 다음과 같이 바뀌었다.

‘오…’

 게임을 위한 공간 인식을 위한 과정은 이전 다른 VR 기기를 접해본 적 없는 내게 꽤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게임 다운로드는 한 시간 정도가 걸렸고 그 사이 VR을 사용해 잠시 ‘넷플릭스’와 ‘메탈슬러그’로 시간을 보냈다.

 

 처음 VR을 출시했을 때 Sony에서 말했던 홀로 영화관 가운데 앉은 기분, 딱 그대로였다. 100인치 정도 되는 스크린이 눈앞에 있었고 그대로도 훌륭하다 생각했다. 이어 게임 다운로드가 끝나고 ‘콜 오브 마운틴’의 세계로 떠난 순간 다시 한번 나의 반응은 달라졌다.

‘와…’

 평소에 생각해왔던 VR이라면 이래야지 했던 것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건 ‘소드 아트 온라인’, 아니면 ‘레디 플레이어 원’의 현실판이었다. 네모난 화면은 없었다. 시야 전체를 가득 채운 게임의 세계만 있었다. 완전한 호라이즌 그 자체였다.

거실에는 아들이 깔아 놓은 장애물이 많다. 조심해야 한다. 최초 플레이 후 플스 본체는 다시 방으로.

 걷고 벽을 타고 오르는 동안 뇌는 분명하게 현실에서 응당 그래야만 하는 느낌을 전달해 주었다. 말도 안 되는 경험이었다. 하지만 시각 정보와 운동 정보의 불일치는 곧 내게 멀미를 선사해 주었다. 멀미 때문에 FPS 게임은 손도 대지 않는 나에게 이건 너무나 커다란 장벽이었다. 메슥거리는 속 때문에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와…’

 그러니 게임 속 화면의 나도 함께 주저앉는다. 그대로 바닥을 쓸어봤다. 속이 메슥거리는 상황에서도 감탄사를 멈추지 못했다. 게임 내 여러 요소는 고개를 끄덕이게 할만했다.

 

 그리고 멀미와 인지부조화를 뛰어넘는 부작용이 남았다. 게임을 플레이하는 내내 실제와는 다른 인지 상태에 적응하려고 했던 뇌는 이제 다른 상황을 직면했다. 현실에서 움직이지 않는 것들이 움직인다는 느낌이 남아 있다. 어린 시절 트램펄린을 한참 타고 땅에 내려왔을 때 땅이 발에 붙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다. 늘 그래왔듯 멀미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찾을 것이고 자연스레 플레이 타임은 늘어날 것이다. 고작 멀미와 인지부조화, 그리고 부작용 때문에 이 새로운 세계의 탐험을 멈추기엔 모든 것이 너무 신선하고 재미있다.

 

 바야흐로 레트로의 시대다. 유행은 돌고 돈다고 했다. 하지만 이를 과도하게 활용하는 대기업들의 생태를 보면 그저 상술에 지나지 않는 행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나 그 유혹은 달콤하고, 언제나 그 유혹에 넘어간다. 여기엔 특별한 목적이나 의도는 없다. 그저 인간 본연의 욕망, 과거의 향수를 잊지 못하고 그리는 끌림이 자연스레 구매로 우리를 이끌었을 뿐이다.

 

 기업들의 홍보의 장이라고 충분히 의심 가능한 다음 어딘가의 카테고리. 그곳에 가면 신제품 및 한정판 제품의 정보가 시시각각 업로드된다. 물론 유용한 정보나 가십거리 들도 많다. 그중에서 이번에 아내의 시선을 끈 것은 이 제품이었다.

'델몬트 오렌지 주스 미니병 세트’

아침의 주스를 가장 선호하지만 역시 오렌지 주스의 대명사는 델몬트다.

 응답하라 시리즈를 보며 가슴이 뛰었던 사람들이라면 응당 눈길이 가는 제품일 것이다. 응답하라 시리즈를 아직도 보지 않은 나조차도 가슴이 뛰었다. 하물며 250ml라니. 더군다나 한정판이라는 이야기는 내 구미를 더 끌어당겼다.

롯데와 날이 갈수록 친해지는 기분이다.

 퇴근길에 마주한 작은 택배 상자 하나. 무게는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다. 유리병이기에 포장도 꼼꼼하게 잘 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마주한 초록색 병뚜껑은 가슴을 설레게 한다. 함께 딸려온 플라스틱 상자까지 완벽했다.

꼼꼼한 포장. 마음에 든다.
초등학교 앞에서 삐약 거리던 병아리들을 보는 것만 같다. 얼른 꺼내 달라며 손짓한다.
사진은 커 보이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스티커였다. 병에 부착되지 않고 별도로 들어 있는 스티커는 구매자가 일일이 붙여야 했다. 그러나 거기엔 숨겨진 이유가 있었다. 롯데에서 이 작은 크기의 음료수 병을 출시한 목적 말이다.

오렌지 농축액 17%, 250ml. 그렇다면 대략 80%는 물이다.

 그것은 바로 병의 재활용이었다. 이미 이 세트를 구매한 여러 사람들은 주스를 모두 마신 후 재사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인테리어나 재사용 등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스티커가 붙어 있다면 그것만큼 불편한 일은 없을 것이다.

아까워서 어떻게 딸 것인가?

스티커를 떼어내다가 행여나 조금이라도 찢어지거나 접착액이 남는다면 그것을 제거하기 위해 감당할 수 없는 스트레스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스티커를 붙이지 않고 별도로 동봉한 것은 참으로 가슴 따뜻해지는 배려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아내는 한 번씩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주스를 마실 날을 꿈꾸지만 한정판을 몇 번 경험했음에도 첫 번째 병의 뚜껑을 따는 일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유통기한 천년 만년인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내와 아침을 함께 하며 큰마음 먹고 하나 열었다. 뭐, 맛은 오렌지 주스 맛이다.

스티브 잡스가 살아생전 ‘one more thing’을 외치며 꺼냈던 맥북 에어, 백라이트조차 없던 그 노트북을 사용하기에 아직도 큰 문제가 없다. 이제는 강력한 M1 칩으로 무장한 그 노트북을 홈페이지에서만 보며 오랜 기간 동경해왔던 나에게 아내가 묻는다.

 

“나 돈 들어오는데 애플 워치 사줄까?”

 

 잠시 고민에 빠진다. 특별히 잘못한 것은 없다. 사소한 일도 그렇고. 무언가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는가 조금 더 생각의 범위를 확장해 본다. 하지만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듯 이번엔 무척이나 기분 좋은 다른 대화가 이어진다. 1년 넘게 이어진 아내의 사업이 드디어 성과를 낸 것이었다. 그 성과의 첫 번째 결실이 바로 나에게 주려는 선물이었다.


 탁자 위를 오랜 시간 장식하고 있는 1세대 애플워치는 방치된 지 일 년이 넘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그것 때문에 애플 워치 얘기를 꺼냈다고 생각했다. 마음속에서 애플 워치와 아이패드, 그리고 맥북 에어. 그리고 에어팟이 서로 자신을 택해 달라며 순위 경쟁을 벌였다. 새로 나온 아이맥까지 자신을 잊지 말라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미 2019년형 16인치 맥북 프로가 있고 혼수로 산 2017년형 아이맥과 떡하니 책상 위에서 버티고 있는 상황에서 노트북을 추가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방치된 애플 워치 옆에 더 오랜 시간 방치되어 있던 아이 패드 미니 1세대(액정 자가 수리 후 더는 화면이 나올지 않는)와 그 옆에 함께 방치된 아이패드 에어 1세대(액정이 깨진)가 눈에 어른거렸다.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고 가격과 옵션을 비교한 끝에 내린 결론은 아이패드 프로 11인치 (3세대)였다. 매직 키보드와 애플 펜슬(2세대)까지 추가하니 맥북 에어쯤은 거뜬히 살 수 있는 가격이 되었다. 물론 이 가격이면 맥북 프로도 살 수도 있다. 아내의 결정적 한마디가 최종 구매 품목을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살 때 제일 좋은 걸로 사야 나중에 후회 없다. 다시 살려면 돈 더 들어간다.”

 

 사게 되면 그동안 미뤄둔 글과 블로그에 열심히 매진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애플 공홈에 접속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선택해 본 적 없던 각인 옵션과 선물 메시지까지 입력하며 구매에 열의를 다했다.

 

 하지만 애플이 내게 보여준 서비스는 상상을 초월했다. 각각의 배송일이 상이한 것, 여기서 더 의문이 드는 것은 도착 예정일이었다. 순서대로 매직 키보드, 애플 펜슬(2세대), 그리고 아이패드였다. 그것도 매직 키보드와 아이패드의 도착 예정일 차이는 1주였다. 아이패드 기준으로 한 번에 보내주지 않는 상황도 준비되는 대로 개별 발송하는 상황 그 어떤 것도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결제 이후 그렇게 며칠이 지났다.


‘Apple Store: 오늘이 바로 기다리시던 그날입니다.’

 

가슴 설레는 휴대전화의 메시지 알림 후 정말로 키보드가 먼저 도착했다.

아이패드가 없으면 무용지물.
보호와 키보드의 편의는 충분히 제공한다. 하지만 아이패드만 들고 따로 쓰려면 불편도 함께 제공한다.

‘Apple Store: 오늘이 바로 기다리시던 그날입니다.’

 

그로부터 며칠 후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애플 펜슬만 도착했다.

 

 

계속해서 펜을 잡고 무언가를 쓰고 싶게 만든다.
둘째를 기원하며 애플 제품 중 처음으로 새겨 본 각인. 물론 아이패드와 함께 새겼지만 애플 펜슬이 먼저 왔으니 처음.

 

‘Apple Store: 오늘이 바로 기다리시던 그날입니다.’

 

 드디어 오랜 기다림을 끝낼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메시지는 퇴근 시간마저 앞당겼다. 집에 도착한 나를 반기는 택배 상자는 앞의 것들이 그랬듯이, 하지만 조금 더 큰 크기로 나를 반겼다.

 

배터리 내장 제품이라 그런지 위협적인 그림의 스티커를 붙여준다.
영롱한 외장을 보면 나도 언젠가 저런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생각보다 가볍다. 그리고 잘 보이지 않는 두 번째 각인. 그마저도 매직 키보드를 붙이면 완전히 가려진다.

 생김새는 이미 기사나 홈페이지를 통해 충분히 확인한 후였지만 생각보다 가벼운 무게는 충분히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필름을 먼저 붙인 후 키보드를 부착하니 무게가 상당하다. 아마도 맥북에어보다 조금 더 무거운 느낌이라는 생각이 든다.

M1을 이렇게라도 느껴보자.
노트북도 그렇다고 태블릿도 아닌 것 같은 애매모호한 느낌. 그리고 스페이스 바를 오른손으로만 치는 것은 안 비밀.

 일렉트로 마트를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체험해본 애플 펜슬을 직접 사용해보니 또 다른 느낌이다. 부드럽게 밀려 나가고 실제 펜과 큰 이질감 없는 필기감은 써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느낌이다. 그리고 아마도 돌을 앞둔 우리 아이는 책보다 이런 전자기기를 통해 세상을 배우는 데 익숙해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누군가는 종이의 종말을 예언했고 누군가는 책의 종말을 예언했지만 우리는 아직 종이를 사용하고 책을 본다.

 

 그런 의미에서 아이패드는 확고한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책을 보고 영상을 즐기며 나아가 게임까지 할 수 있는, 그것도 커다란 화면이 주는 사용감은 다른 제품과 비교할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노트북이 채워주기 어려운 부분이다. 물론 요즘은 태블릿과 노트북 일체형이 나오지만 개인적으로 성에 차지 않는다.

 

 거의 모든 애플 제품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 생태계에서 주는 편안함에 빠져 있기에 더욱 그러리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애플 키보드를 사용해 타이밍을 하고 있지만 조금의 이질감도 없다. 타건감은 애플 무선 키보드와 맥북 프로의 키보드, 그 중간쯤 되는 느낌이다. 좁은 배열이지만 오타 없이 타이밍을 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 또한 맥 환경에 익숙한 나이기에 맥의 단축키를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은 또 하나의 장점이다.

 

 다만 사악한 가격은 구매를 망설이게 하는 끊임없는 걸림돌이다. 그러나 애플의 장인 정신이 매년 선사하는 새로운 제품들은 언제나 내 지갑 앞에서 군침을 흘린다. 그리고 나는 언제나 망설임의 끝에서 그 앞에 지갑을 열어 보이고 만다.

 

 

이제, 유년 시절을 떠올리려면 꽤 많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블리자드와의 인연을 생각해 보면 지금으로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스타크래프트, 브루드 워, 디아블로 등. 그중에서도 워크래프트는 추억의 한 축을 담당한다. 2016년에 개봉한 워크래프트 영화도 본 적이 있다. 물론 영화 내용은 조금도 기억에 남지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WOW(World of Warcraft). 게임을 실제로 플레이해본 적은 없다. PC 앞에 앉아야 하고 시간 조절도 어려운 MMORPG 자체를 선호하지 않는 이유도 있다. 하지만 나이가 들며 유년 시절을 함께 PC방에서 보냈던 친구들이 점점 게임보다 술을 가까이하게 된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워크래프트, 그중에서도 호드와 얼라이언스 진영의 대립 정도는 잘 알고 있다. 그것이 바로 ‘스몰월드 - 워크래프트’ 보드 게임 펀딩에 참여하게 된 계기다.

* 사실 보드 게임을 받은 건 몇 달도 더 된 일지만 육아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다가 이제야 글을 올린다.

 생애 첫 펀딩. 그것은 펀딩은 와디즈를 통해 진행되었고 주체는 만두게임즈였다. 여러 가지 펀딩 옵션이 있었지만 구성의 차이 외엔 별다를 게 없었다. 가격의 차이뿐만 아니라 구성품이나 배송 일정의 차이도 없었다. 하지만 기분상 얼리 버드 옵션을 선택했다.

 


 간간이 리워드 발송 관련 알림을 통해 소식을 접하고 있었지만 코로나로 인해 일정이 두 차례 정도 지연되었다. 그렇게 펀딩에 참여한 것조차 까맣게 잊고 지내던 어느 날 드디어 현관문 앞에서 반가운 택배 상자를 맞이했다.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구성을 살펴보자.

 미리 알림을 받은 대로 오류 수정 스티커가 하나 들어 있었다. 스몰월드 보드게임에 워크래프트 컨셉을 차용했다는데 사실 스몰월드라는 보드게임은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가슴이 설렌다.

 

규칙서를 보면 수학의 정석을 만난 것처럼 가슴이 먹먹하다. 그것도 아니면 기초 성문법.
뭐가 많다.

 

팀플레이가 가능하다지만 아내가 나와 상대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다.
정리도 깔끔하다.
문제의 수정 포인트는 매뉴얼의 상단에 있다.
별로 감쪽같지 않지만 완벽한 위치에 정확하게 안착시켰다.

 신속하게 매뉴얼을 보며 전체 룰을 파악한 후 아이가 잠든 틈을 타 아내와 바로 진검 승부를 펼쳤다.

 

나는 호드, 아내는 얼라이언스를 택했다.
게임 중반에는 몇 번이나 내가 이기는 모습을 상상했다.

 한 시간 남짓 이뤄진 승부의 승자는 역시나 아내. 최근 보드 게임 맞대결에서 단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다.

 

골드가 많은 자가 승리한다.
골드에서도 차지한 땅에서도 이길 수 없었다.

 내가 대적할만한 상대는 잠든 아이. 그것도 커서 초등학교 들어가서 나 가능한 일이겠지만.

 

좋은 신발만큼 개발자에게 좋은 마우스가 필요한 이유

 좋지 않은 습관이 있다. 마우스나 키보드를 사용할 때 오른쪽 손바닥 바깥쪽 뼈를 책상에 짓누른다. 그것이 잠깐이라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직업이 프로그래머이고 취미가 글쓰기인 나에게 습관은 참기 어려운 통증을 가져다주었다.

 

 은퇴를 고민할 만큼의 통증은 점점 나를 괴롭혔다. 물론 해결책은 있었다. 손목 패드를 사용하는 것. 그러나 그것은 한계가 있었다. 마우스와 키보드를 번갈아 사용하다 보면 어느샌가 손목은 책상과 맞닿아 있다. 뒤따르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리다 결국 찾아본 것이 인체공학 키보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Kinesis. 하지만 50만 원대의 사악한 가격에 마음을 접었고 합리적인 가격의 마이크로소프트의 스컬프트 라인을 선택했다.

 

 장점은 키보드의 손목 받침 부분을 높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손목이 자연스럽게 허공에 떠있게 되어 좋지 않은 습관에서 손쉽게 해방되었다. 문제는 마우스에 있었다. 오랫동안 사용하니 휠이 뻑뻑해지며 휠을 둘러싼 고무가 마모되었다. 급기야 휠을 돌려도 한 번씩 인식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대안을 찾다 도착한 선택지는 Apple Magic Mouse2다.

 


마우스야 네가 아무리 잘나봤자 내가 딴 거 쓰나 애플 쓰지

 맥북과 아이맥을 사용하며 트랙패드에 익숙한 나로서는 Magic mouse를 사용하며 느낀 좋은 경험을 확장하고 싶었다. 단점은 사용해야 할 환경이 윈도우라는 것. 찾아보니 이런저런 유틸을 사용하면 맥 환경에 가깝게 사용할 수 있지만 완전한 경험은 불가능했다.

 

 와이프도 허락을 했겠다, 정 안되면 집에서 사용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과감하게 주문을 강행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택배가 도착했다.

 애플답게 포장은 깔끔했다. 단출한 구성과 매끈한 디자인은 여전하다. 마우스 본체, 충전 케이블, 매뉴얼이 전부다. 물리 휠이 없어 제스처로 휠 동작을 인식한다. 물론 윈도우에서는 별도 유틸 없이 뒤로 가기와 앞으로 가기 제스처가 동작하지 않지만.

 

 혹시나 충전이 필요할까 싶어 급속 충전기에 잠시 꽂은 후에 맥에 잠시 연결해 보았다. 전원만 켜도 바로 인식이 되고 심지어 앞에 충전이 필요 없을 정도로 완충 상태다.

 이제 회사의 마우스를 교체할 차례이다. 연결에 필요한 블루투스 동글은 예전에 몇천 원 주고 산 제품을 이용했다. 윈도우10에서 막힘없이 연결이 잘 된다. 휠 기능 사용을 위해 부트 캠프 드라이버도 설치했다. 이질감이 있지만 적응하기 어렵진 않았다.

 가장 큰 문제는 PC를 껐다 켤 때마다 블루투스를 재 연결해 줘야 한다는 것. 내적 갈등이 시작되었지만 제스처로 사용하는 휠 기능이 주는 매력을 쉽게 포기할 생각은 없다. 덕분에 회사 PC는 당분간 전원 꺼질 일이 없을 듯하다.

 

아빠와 유모차

 

첫아이의 첫 유모차를 디럭스 모델인 잉글레시나 앱티카 써밋 쟈카드로 시작하게 되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래 참고.

2020/11/18 - [주전부리 레시피/벨 소리가 울리면] - 땡스 기빙 it. 6화 - 잉글레시나 앱티카 써밋 쟈카드

 

땡스 기빙 it. 6화 - 잉글레시나 앱티카 써밋 쟈카드

 코로나의 위세가 꺾이기는커녕 오히려 수도권을 중심으로 더 늘어만 간다. 아직 어린아이를 위해 외출도 삼가며 최대한 집에 있으려고 하지만 여의치 않은 일이다. 아무리 집돌이 집순이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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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럭스 모델을 사용하며 느낀 장점은 안전. 단점은 무겁다. 공간을 많이 차지한다. 차에 실을 때 번거롭다. 등등.

 

 이런저런 이유가 있었지만 조카를 위한 선물을 빨리 고르라는 형의 독촉 아닌 독촉이 가장 큰 동기가 되었다. 더불어 휴대용 유모차의 갈증을 이겨내지 못한 우리는 결국 구매를 위해 베이비 플러스에 다시 방문하게 되었다.

 

 매장에 직접 방문해서 끌어보고 접어보고 들어보는 것은 중요한 과정이다. 유모차에 대한 전반적인 사용과 관리 책임은 대부분 남편에게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용해봐야 이 말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다.

 

 사전 조사는 아내가 끝냈기 때문에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가격 기내 반입 가능 여부. 코로나가 끝나고 혹여나 아이와 함께 비행기를 탈 경우, 그때 필요한 유모차를 추가로 구매할 생각은 없었다. 일부 저가 항공사에서는 기내 반입이 불가능할 수도 있다고 했지만 그 정도는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고려 중인 몇 가지 모델이 있었지만 가장 유명하고 저가항공을 비롯한 모든 기내 반입이 가능한 요요2는 제외했다. 디럭스 모델에 버금가는 사악한 가격과 액세서리를 추가로 구매해야 한다는 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 되었다.

 

 그다음 후보가 몇 가지 있었지만 잉글레시나 앱티카 써밋 쟈카드를 사용하며 느낀 가장 큰 장점인 안전. 그것에 대한 좋은 느낌이 결국 잉글레시나 퀴드2를 선택하도록 나를 이끌었다.


Inglesina Stroller Quid2. 3층 기저귀 카트 대비 2층 높이다.

 구매 며칠 후, 집에 돌아오니 다소 아담한 박스가 우리를 맞이했다. 엄청난 박스 크기를 자랑했던 잉글레시나 앱티카와는 달리 퀴드2 모델은 휴대용에 걸맞은 크기다. 휴대용 유모차에 적합한 무게는 과연 얼마인지는 의문이다.

설명서는 이케아처럼 쉽게 만들어주세요.
듬직한 바퀴.
꽂으면 끝이다.

 이케아 설명서에 준하는 설명서를 따라 아내와 함께 조립을 진행했다. 언제 봐도 듬직한 바퀴만 잘 꽂아 넣으면 끝이다.

손잡이가 있긴 한데... 7.25kg
아늑한 공간을 자랑한다.
아이의 안락한 탑승 환경을 위한 손잡이. 실제로는 탈출 방해 장치...
조립 후 접으니 잘 접힌다. 마지막으로 접은 뒤 편 적은 없다.

 아직 디럭스 모델을 잘 사용하고 있기에 집에서만 시범으로 몇 번 태워본 것이 전부다. 그리고 그 후에 잘 접어서 구석에 두었다. 확실히 디럭스 모델에 비해 공간도 덜 차지하고 접었다 펴기도 쉽다. 하지만 아기의 월령이 어려 디럭스를 조금 더 사용한 후에 휴대용 모델을 사용하기로 아내와 결정했다.

 

 물론 지박령처럼 현관을 떠나지 못하는 앱티카를 치우기 귀찮아서는 아니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아내가 질문을 꺼낸 건 할로윈을 앞둔 어느 날이었다. 아이의 백일 사진 촬영이 며칠 후에 있을 예정이었기에 기억은 선명하다.

 

이거 살까?

 

 육아 용품과 끼니를 때울 신선 식품이 하루가 멀다 하고 택배로 오는 요즘, 나의 답변은 한결같다.

 

필요하면 사야지.

 

 그러면 보통 휴대전화에 결제를 알리는 문자가 오는데 이번은 조금 달랐다.

 

와서 한번 골라봐.

 

12종의 위엄

 


 

머거본 a.k.a 술안주

 

 아이가 잠든 후 멍하니 TV에 고정되어 있던 눈알을 굴려 아내의 휴대전화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안에 펼쳐진 것은 끝도 보이지 않는 머거본의 향연이었다. 맥주 한 캔이면 한계에 다다르는 나를 위한 것은 아니었다.

 

 아이가 태어난 이후로는 혹시 모를 응급 상황에 대비해 술은 입에도 댈 수 없었다. 상대적으로 아내가 운전에 미숙한 이유도 있었다. 또한 모유 수유 중인 아내가 술을 마실 것도 아니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만 나는 이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의 간식

 

 그랬다. 처음부터 철저하게 계획된 아내 스스로를 위한 선물이었다. 대량 구매가 가능한 품목들이 있었지만 샘플러처럼 여러 가지를 맛볼 수 있는 할로윈박스 세트(12종 구성)가 괜찮아 보였다. 할로윈 박스를 증정한다는 말도 관심을 끌었다. 무엇보다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아내의 한마디 말이었다.

톡딜이라 12,900원이면 살 수 있어.

 

 할로윈의 기원도 제대로 모르는 내가, 그리고 톡딜은 무엇인지 들어본 적도 모르는 내가, 그렇게 아내의 구매를 지지했다. 정가 32,000원 대비 약 60% 할인된 가격. 아직도 믿을 수 없는 그 가격에 결제는 진행되었다.

 


생각보다 아담한 주황색의 할로윈 박스

 애초에 결제할 때만 해도 음식점 앞이나 마트의 흉물스러운 크기를 상상했었다. 하지만 택배 상자 안에 담긴 그것의 크기는 꽤나 아담했다.

언제나 첫 만남은 설렌다.
하얀 박스 안에 넣을 거면 다 넣지 김새게 몇 개를 빼놨다.
하얀 상자는 도라에몽의 주머니처럼.
가지런히 자리를 잡고 맥주를 부른다.
그래서 꺼냈다. 하지만.

 가지런히 정리한 12종의 간식거리를 주방 구석에 자리한 이케아 이바르 선반에 올려놓았다. 이미 공간을 차지한 수많은 라면과 다른 과자들을 밀어내고 당당히 한자리를 차지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함께 꺼내본 최애 하이네켄 150 ml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를, 아내는 날카로운 눈초리로 째려본다.

 

기분만 내보는 거야.

 

 

 

 

요즘 들어 거의 하루에 한 번은 택배가 온다. 한 번 이상 오는 날도 허다하다. 코로나의 영향이 있다고는 하지만 아이가 태어난 영향이 더 큰 듯하다. 대부분의 택배는 내용물을 알았지만 이번은 달랐다.

“이게 뭐야?”

“일단 열어 보면 알아.”

 

 아내는 해맑은 얼굴로 택배 박스를 뜯는다.

“삼립호빵?”

 무언가를 산다고 하면 사지 말라고 했던 적은 없지만, 유난히 신경 쓴 포장 박스에 괜스레 의구심이 일었다. 곰곰이 지난 기억을 더듬으며 놓친 부분이 없는지 되짚었다.

‘호빵만 먹으면 되는 걸 혹시 충동구매를 한 건가?’

 

 고개를 갸우뚱하는 나를 두고 신이 나 박스를 여는 아내. 아이 때문에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는 사이 아내가 무엇을 들고 꺼내서 보여준다.

 

“그게 뭐야?”
“여기다가 호빵 쪄 먹는 거야. 이거 한정판인데 나 사고 품절. 대박이지?”

 

 대단한 건 알고 결혼했지만 언제 봐도 대단한 여자다. PS4 대란이 일었을 때도, 괄도네넴띤 한정판 대란이 일었을 때도, 마스크 대란이 일었을 때도 그 어려운 걸 아내는 묵묵히 해냈다. 아 그리고, 최근 닌텐도 스위치 대란에서도. 특히 이런 한정판 분야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삼립호빵 호찜이 굿즈 에디션’

 

 내용물은 전체 단팥 호빵 6개, 야채 호빵 3개, 피자 호빵 3개였다. 그리고 호찜이. 호빵의 맛이야 일 평생을 먹어 왔는데 궁금해할 것이 없었다. 오로지 나의 주 관심사는 호찜이였다.

 

 육아 때문에 정신없던 날이 며칠 지나고 나서야 간신히 상자를 다시 열었다. 왜 단팥 호빵과 야채 호빵이 반대로 들어 있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오랜 경험에 의존해 야채 호빵을 찾아냈다. 이상하게 아직도 단팥 호빵에는 손이 안 간다.

 

 아는 사람은 안다. 사진을 자세히 봐도 알 수 있지만 왼쪽에 야채, 오른쪽에 단팥이 들어있다. 그리고 호찜이를 사용해 호빵을 쪄냈다. 사용법은 간단했다.

1. 아래쪽의 물통에 물을 조금 넣는다.

2. 하얀색 채반 위에 호빵을 하나 올린다.

3. 뚜껑을 닫고 전자레인지에 1분 돌린다.

 

 그렇게 데워 낸 호빵은 코흘리개 시절에 슈퍼 앞의 찜기에서 모락모락 김을 피워내던 딱 그 맛이었다.

이로서 월동 준비는 끝났다.

 

*전체 개봉기 및 실 사용기는 아래 영상에서 확인 가능하다.

https://youtu.be/ntdPI4HI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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