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마스이브, 이현에게 있어 그다음 날은 12월 26일이었다. 오늘 잠들면 26일 아침까지 절대로 깨지 않을 계획이었다. 모든 준비는 완벽했다. 밤까지 새 눈이 벌건 그는 물끄러미 제 손에 휴대전화를 응시했다. 사람이 바글거리는 명동에 우두커니 서 있는 건 자신뿐이었다. 어서 자신을 구해줄 친구 놈의 연락만을 기다렸다. 그때, 이제나저제나 기다리던 휴대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

 

“미안.”

 

 이현이 기다린 첫마디와는 많이 달랐다. 아마도 ‘어디야’ 정도를 기대했을 것이다. 그는 침착하게 당황스러운 마음을 다스렸다.

 

“전화를 받자마자 사과라니. 미안해할 것 없어. 어째서 미안한 거야. 아직 일곱 시라고. 기다릴 수 있어.”
“하, 그게.”
“아니야. 듣고 싶지 않아.”
“정말 미안하다. 퇴근은 고사하고 내일도 출근하게 생겼다.”

 절망 섞인 한숨이 흘러나온 순간 이현은 깨달았다. 그 짧은 한숨은 친구의 긴 변명을 모두 대변하고 있었기에.

 

“이현아, 내가 어떻게든 가보려고 했는데. 나도 어쩔 수가 없다. 다음에 내가 꼭 술”

 

 그는 심드렁한 얼굴로 휴대전화를 자신의 귀에서 뗐다. 친구가 술을 사겠다고 하는지 얻어먹겠다고 하는지 관심이 없었다. 이 상황을 모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이곳에 멍청하게 혼자 서 있는 것은 자신뿐이었다. 이제 자신을 구원해줄 누군가도 없었다. 휴대전화 연락처를 뒤지던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엇을 하든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뿐이었다.

 

 지금 자신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한 개비의 담배였다. 그의 손은 분주하게 코트 안주머니를 뒤졌다. 익숙하게 담배를 하나 꺼내 문 그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눈을 지그시 감은 그는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다른 주머니를 뒤질 필요도 없었다. 친구보다 더 야속한 라이터는 따뜻한 방 안 책상 서랍 속에 고이 잠들어 있으리라.

 

 입에 문 담배를 손에 쥔 그는 애먼 입술을 깨물었다. 차라리 혀를 깨물어야 할까 싶었다. 하지만 그는 독립투사가 아니었다. 고백할 무언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때, 거짓말처럼 다른 구원자가 나타났다. 그는 자신이 깨문 것이 혀가 아님을 신께 감사했다.

 

 몸에 딱 붙는 베이지색 코트는 빈틈없이 그녀의 몸을 따라 무릎 위까지 이어졌다. 옅은 갈색의 주름진 롱코트는 검정 레깅스가 둘러싼 매끈한 다리를 돋보이게 했다. 적당히 높은 검은 구두의 굽은 그녀의 자신감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의 시선은 코트 안으로 보이는 아이보리색 스웨터를 지나 그녀의 손에 머물렀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목표를 향해 달려들었다.

 

“저기요.”
“네?”

 

 어깨에 닿은 구불거리는 그녀의 머리칼은 부드러운 파도와 같았다. 파우더 향과 섞인 향긋한 향수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눈처럼 새하얗고 고운 얼굴에 박힌 두 눈동자는 보석이 따로 없었다. 주위의 모든 움직임은 느려졌다. 그의 눈은 그녀의 모든 것에 집중했다. 어느 것도 놓칠 수 없었다. 아니,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듯 이 모든 것은 자연스러웠다. 몸부림쳐도 벗어날 수 없는 우주의 섭리였다. 그렇기에 그의 눈은 이끌리듯 그녀의 눈동자와 일직선 상에 위치했다. 

 

“불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아, 네. 그럼요.”

 

 라이터를 내미는 작고 앙증맞은 손끝에 이현의 손끝이 스쳤다. 추위에 얼어있던 몸이 떨린 것은 아니었다. 온몸에 퍼진 짜릿한 전율이 그의 몸을 춤추게 했으리라. 쿵쾅대는 심장은 그의 중심을 뒤흔들었다. 그렇지만 손에 든 라이터는 놓치지 않았다. 어쩌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수도 있었다. 

 

 이현은 담배에 불을 붙인 뒤 연기를 길게 빨아들였다. 빨아들인 연기는 입김에 섞여 허공에 흩날렸다. 그 사이 그녀도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에게는 이 담배가 성냥팔이 소녀의 성냥처럼 느껴졌다. 한 개비의 담배를 모두 피우기 전까지 그에게는 기회가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오히려 그의 존재를 귀찮게 여기는 듯했다.

 

 그렇지만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였다. 곳곳에선 캐롤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리고 구원받은 그는 내일의 의미를 되새기고 싶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손엔 어떤 반지도 없음을 확인한 그였다. 모든 시도가 수포로 돌아간대도 상관없었다. 무슨 말이든 내뱉어야 했다. 

 

‘사랑한다고 말할까? 아니면 첫눈에 반했다고 해야 할까?’

 

 자극적이고 상투적인 표현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 사이 담배는 줄어들고 있었다. 그녀는 손목의 시계를 거듭 확인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녀의 담배도 그의 것과 마찬가지였다. 심지를 잃어가는 초처럼 곧 그 생명을 다하고 말리라.

 

“저기.”
“네?”

 찌푸린 미간조차 완벽했다. 태어나 세상에서 처음 제 어미를 마주한 짐승처럼 그녀의 얼굴은 그에게 각인되었다.

 

“술 한잔 사고 싶어요.”
“네?”

 

 조금 전보다 과장된 대답과 표정이었다. 멈춰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이제 자신의 담배는 한 모금 정도의 연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 뿐이었다.

 

“생각해봐요. 이 담배가 성냥이라고. 성냥팔이 소녀가 불이 꺼질 때까지 행복한 상상을 하잖아요. 그냥 나도 그런 거예요. 이렇게 멋진 여자를 앞에 두고, 그것도 크리스마스이브에. 그냥 지나친다면 그 쪽에게 지나친 실례 아닐까요? 그래서 나는 이 기회를 단지 상상만으로 남겨두고 싶진 않은 거예요.”

 

 적막이 흘렀다. 세상엔 단둘이 존재하는 것처럼 모든 소리가 차단됐다. 숨소리조차 희미했다. 그녀는 이현의 두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아무런 말도, 어떤 몸짓도 없이 그렇게 잠시 그를 살폈다. 이윽고 담배를 물어 연기를 깊게 빨아들인 그녀는 입을 동그랗게 말았다. 그 사이로 뿜어진 연기는 차가운 공기와 뒤섞였다. 동시에 그녀는 퉁명스러운 말투로 대화의 끈을 이었다.

 

“그런데요.”
“네?”
“담뱃불 꺼졌는데요.”
“그게 무슨?”
“내 말은. 그쪽 담뱃불 꺼졌으니까 이제 행복한 상상 끝 아니냐고요. 아 참. 그리고 성냥팔이 소녀는 결국 얼어 죽는데. 그쪽도 죽으려는 건 아니죠?”

 

 이현은 고개를 연신 좌우로 흔들었다. 그 사이 그녀의 담배꽁초는 땅바닥에 떨어졌다. 익숙한 듯 구두로 아직 꺼지지 않은 불을 비벼 끄던 그녀는 그를 곁눈질로 살폈다. 180 정도의 키에 잡티 하나 없는 하얀 얼굴이었다. 샌님 같기도 했으나 짙은 눈썹에 날카로운 눈매는 그런 생각을 애초에 할 수 없게 만들었다. 회색의 오버사이즈 코트는 그의 몸에 딱 맞게 떨어졌다. 코트 안으로 보이는 하얀 셔츠와 짙은 남색 니트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어딘가 모르게 달콤한 향이 나는 향수도 나쁘지 않았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그녀는 시계를 다시 한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결심을 내린 듯 이현의 두 눈을 응시했다. 그 또한 그런 그녀를 위해 말을 이어나갔다.

 

“무슨 말 할지 알아요. 그러니까 잠깐만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만 기다려요. 죽을 생각은 없지만, 혹시나 내가 죽어도 절대 도의적인 책임은 묻지 않을게요. 불 빌려준 건 정말 고마워요.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내가 무슨 말을 할 것 같은데요?”
“그야, 당연히.”
“가요.”
“그렇죠. 제가 정신이 나갔었나 봐요. 오늘 같은 날 애초에 밖에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웃음기를 머금은 그녀는 한쪽 눈썹을 추켜올렸다. 이어 자신의 검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닫았던 입을 열었다.

 

“아니, 같이 가자고요. 술 마신다고 바보.”
“네? 아, 정말요?”

 

 순간 너무 크게 튀어나온 이현의 목소리는 주위의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그마저도 잠시였다. 행인들은 제 목적지를 향해 맹목적으로 움직일 뿐이었다. 그것과 상관없이 그의 두 볼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찬바람이 부는 것도 한몫을 했다. 그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몸을 바짝 웅크렸다. 그런다고 찬바람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그러고 있지 말고 좀 걸을까요?”
“그래요. 걸으면서 생각해요.”

 

 이내 둘은 인파 속으로 몸을 숨겼다. 둘을 쫓던 찬바람도 종적을 감췄다. 길거리를 가득 채운 인파 사이엔 온기가 가득했다. 몸이 제법 훈훈해지는 기분이었다. 그제야 잊고 있던 생각이 떠오른 이현은 입을 뗐다.    

 

“술은 잘 드세요? 무슨 술을 사야 하나? 와인 어때요?”
“처음 보는 여자한테 항상 그래요?”
“말을 못 거는 편은 아니지만, 술 사겠다고 해본 건 그쪽이 처음이에요.”
“내가 쉬워 보이나?”
“술 사겠다고 한 사람이 제가 처음은 아니죠?”
“뭐, 처음은 아니긴 한데.”
“오해는 말고 들어요. 그럴만해요.”
“그럴만하다는 게?”
“예쁘다고요. 그쪽.”
“오랜만에 듣네요. 그말.”
“왜요? 그런말 많이 들을 것 같은데.”
“아니에요. 진심 같으니까 일단 좋게 생각할게요.”
“아 참, 그런데 이름이 뭐예요? 계속 그쪽이라고 부를 순 없으니.”
“일단 우리 어디로 갈지 먼저 정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와인이 별로면? 칵테일은 어때요?”

 

 미간을 찌푸린 웃음기 가득한 얼굴의 그녀는 이현을 바라보았다. 이어 살짝 주먹 쥔 손으로 그의 팔을 툭 쳤다.

 

“소주나 사요.”
“그거면 되겠어요?”
“왜요? 뭐 사달라고 하면 다 사주시게요? 그냥 소주 사달라고 할 때 그걸로 사요. 나 술 세요.”

 

 이현이 대단한 것을 기대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렇게 함께 같은 목적지를 향해 걸으리라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그였다. 그녀가 무엇을 원하든 그것은 온전히 그녀에게 달려있었다. 자신에게 속한 문제가 아니었다. 생각에 잠겨 잠시 말이 끊어진 사이에도 둘은 인파에 섞여 흘러갔다. 흐르는 강물처럼 그렇게 둘은 그랬다. 그때 그녀가 곧게 편 검지를 쭉 뻗었다.

 

“어? 포장마차다!”

 

 그녀가 가리킨 곳엔 분명 포장마차가 있었다. 입구에 다가선 그녀는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이현도 그 옆에 멈춰서 잠시 그녀를 살폈다.

 

‘마음이 바뀐 건가?’

 

 그렇다 하더라도 나쁜 시도는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불순한 생각, 그런 생각의 범주가 어디까지인지는 규정할 수 없지만 절대 그럴 의도는 없었다. 단지 자신에게 주어진 선택의 기회를 저버릴 수 없었을 뿐이었다. 생각에 잠긴 그를 그녀는 빤히 바라보았다.

 

“설마, 술 사줄 생각도 없으면서 사겠다고 한 건 아니죠?”
“네? 아니, 그쪽이 가만히 서서 안 들어가길래.”
“잠시 휴대전화 좀 확인한다고 그랬어요. 들어가요.”

 

 들어선 포장마차 안은 길 만큼이나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리고 둘이 오기만을 기다린 듯 자리가 딱 하나 남아 있었다. 빼앗을 누군가 오는 것도 아닌데 이현은 부리나케 자리를 선점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그녀도 천천히 그의 뒤를 따랐다. 

 

“안주는 뭐가 좋겠어요?”

 

 그녀가 자리에 앉는 사이 그가 물었다. 그녀는 그런 그의 질문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듯 입을 열었다.

 

“여기 참이슬 두 병 먼저 주세요!”

 

 그제야 이현이 답변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는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 미안해요. 안주는 그쪽 먹고 싶은 거로 해요. 난 아무래도 괜찮으니까.”

 

 가만히 눈치를 살피던 그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메뉴에 대한 고민도 있었지만, 그보다 달라진 그녀의 표정이 주된 원인이었다. 사실, 달라졌다기보다는 처음부터 그랬을 수도 있었다. 그걸 지금에서야 알아챈 것일 수도 있었다. 모르는 사람과 술자리를 하게 돼서 긴장한 표정과는 달랐다. 둘 사이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막 도착한 소주는 분위기를 뒤섞었다. 소주병을 집어 든 그녀는 웃음기 띈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제 물잔에 소주를 채우며 끊어진 대화를 이었다.

 

“그쪽도 물잔?”
“아, 저는”
“그쪽도 그냥 물잔에 마셔요. 분위기 깨지 말고.”

 

 이현의 잔까지 채운 그녀는 용도를 다한 빈 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어 술이 가득 찬 물잔을 집어 들었다. 그도 마지못해 잔을 들었다. 서로 잔을 살짝 부딪친 후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소주를 조금 들이켰다. 알싸한 알코올 향이 식도를 감쌌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맛이었다. 그 사이 그녀는 제 잔의 소주를 모두 비웠다. 

 

“에이, 첫 잔은 원샷이지.”

 

 당황한 그가 내려놓던 잔을 다시 입으로 가져가자 더 당황한 그녀가 그를 제지했다.

 

“농담이에요. 농담.”
“그런데 무슨 일 있어요?”

 

 손에 턱을 괸 그녀는 그의 말에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아랫입술까지 깨문 그녀는 미간까지 찌푸렸다. 그녀의 시선은 테이블 위에 소주병에 머물렀다. 그리고 손이 소주병에 닿기 전에 그의 손이 먼저 움직였다. 이번엔 그의 손이 그녀의 물잔에 소주를 채웠다. 소주가 물잔에 가득 차자 그는 고개를 돌렸다.

 

“아주머니, 여기 어묵탕 하나 주세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그녀의 물잔이 텅 빈것은. 대신 그만큼 그녀의 볼은 붉은 빛을 띠었다. 취기가 오른 듯했다. 눈을 지그시 감은 그녀는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아, 쓰다. 있잖아요. 아니 있잖아. 처음 만난 사람한테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네.”
“괜찮아요. 어차피 오늘 시간도 많은데요.”
“사실 오늘, 헤어지려고 온 건데.”
“헤어지다니? 누구랑?”
“남편은 아닐 거잖아. 당연히 남자친구지.”
“그런데 헤어지려고 여길 와? 명동까지? 이브에?”
“약속했거든.”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테이블 위에 잘 깎인 오이를 하나 집어 들었다. 끝을 조금 베어 문 그녀는 생각을 정리하듯 오이를 빙빙 돌렸다. 이어 허공에 오이가 멈추자 그녀가 벌어진 대화의 틈을 메웠다.

 

“약속했어. 우리가 헤어지면. 아니 그때가 되면. 꼭 명동에서 보기로. 그래서 기다린 거야.”

 

 이현은 그제야 그녀의 모든 행동이 이해가 됐다. 계속해서 시계를 들여다보던 그녀의 모습. 그리고 포장마차 앞에서 망설이던 모습까지.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자신이 이용당한 것이었다. 둘의 이별식에 자신은 들러리일 뿐이었다. 그저 희생양에 불과했다. 불쾌한 기분을 이겨낼 자신이 없었다. 결심이 선 그는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술은 잘 마셨지? 나도 잘 샀어.”
“가지 마.”
“사실 난 고마웠어. 좋은 추억이 될 거라고 생각했거든. 어쩌면 정말 어쩌면, 더 나아가 더 나은 관계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그게 아니더라도.”
“그러니까 가지 마. 잠시만 그냥 그렇게 내 앞에 있어 줘. 그렇지 않으면 내가 오늘 너무 비참할 것 같아서 그래.”

 

 그녀의 눈엔 어느덧 눈물이 글썽거렸다. 이현은 깊은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테이블 위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어묵탕이 올라와 있었다. 둘 사이의 온도는 그보단 차가웠다. 그는 말없이 제 앞의 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런다고 답답한 기분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지만. 정리가 필요했다. 순식간에 꼬여버린 실타래 같은 지금의 상황을 풀어나가야 했다. 그녀가 떨어지는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치는 사이 그가 굳게 닫았던 입을 열었다.

 

“그래. 좋다. 뭐가 됐든. 그래서. 넌 도대체 이름이 뭐야.”
“시아. 이시아.”
“나이는?”
“스물다섯.”
“그런데 왜 반말해?”
“아니, 그게 있잖아요. 오빠는 몇 살인데요?”
“스물다섯. 이름은 정이현.”
“스물다섯이면, 나랑 동갑인데? 너는 왜 반말했어?”
“네가 반말하길래. 오빠는 듣기 좋네. 그래서 왜 헤어지려는 건데? 남자가 바람이라도 피웠어?”
“아니. 그런 건 아니야. 그냥 변했대.”
“어떻게 너처럼 예쁜 여자를 두고? 그 사람 정신이 좀 이상한 거 아니야?”

 

 시아는 코웃음을 치며 테이블 위의 소주병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물잔을 바라보다 말고 소주잔에 남은 소주를 채웠다. 이미 비어 있는 그의 잔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이 변하면 정신이 이상한 거니?”
“그런 건 아니지만.”
“뜨거울 때도 차가울 때도 있지. 변하는 건 이상한 게 아니야. 뜨거웠던 시절에. 서로가 바라만 봐도 웃음이 났던 시절에. 이제 와서 그런 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 헤어지는 마당에.”
“도대체 난 이해를 못하겠네. 네 말처럼 헤어지는 마당에, 넌 여기서 왜 이러고 있는데?”
“사랑했으니까. 진심이었으니까. 그 사람이 날 사랑하지 않았어도. 진심이었다면 우리가 헤어지는 순간에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믿었어.”

 

 이현은 제 앞의 술잔을 바라보다 술병에 남은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러고는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술병을 내려놓았다. 얼얼한 입은 짭조름한 어묵 국물이 달래주었다. 도무지 답답한 가슴은 달랠 길이 없었다. 쓴웃음을 지은 그는 카운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모,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난 이제 괜찮은데.”
“이건 내가 마실 거야. 그렇다고 마시지 말라는 건 아니야. 그래서 이게 최선이라는 거야? 헤어지려고 나왔다가 모르는 남자랑 술이나 마시고 있는 게?”
“최악은 아니라고 생각해. 이게 최악이라면 너에게나 나에게나 너무 끔찍하지 않겠니?”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그 사람이 지금 네가 이러는 걸. 내 말은 그러니까, 이런 시간과 이런 노력을 그 사람은 조금도 알지 못할 텐데. 무슨 의미가 있냐는 거야. 헤어지면 그냥 끝인 거야.”
“끝은 끝이지. 그냥 난 그래. 확인하고 싶었어. 우리가 어떻게 시작했고, 어떻게 사랑했고, 어떻게 이렇게 됐는지. 잘잘못을 가리자는 건 아니었어.”
“하나만 묻자. 그 사람. 사랑해?”
“아마도. 그런 것 같아.”

 

 불확실함. 정의되지 않은 상태.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할 애매한 감정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그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저기, 시아야.”
“응?”
“난 그 사람이 얼마나 잘난 지 모르겠어.”
“사진 보여줄까? 아, 참. 그건 실례다. 미안.”
“그래. 그건 좀 심했어.”

 

 이현은 서로의 빈 술잔을 채웠다. 시아는 두 손으로 턱을 괸 채 그런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문득 마주친 그의 눈동자 안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거리가 있어 생각만큼 선명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그를 향해 조금 기울였다. 당황한 그가 몸을 뒤로 빼기 전에 그녀는 분명히 알았다. 슬픔에 잠겨 누구도 건져낼 수 없는 최악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혼잣말처럼 절망감을 되뇌었다.

 

“이별이 시작처럼 쉬우면 얼마나 좋을까. 절벽에서 뛰어내리듯 이별도 단숨에 끝났으면 좋겠어. 왜 이별은 시작처럼 간단하지 않을까.”
“글쎄. 그게 사랑의 기본적인 성향 아닐까. 아무것도 서로 사이에 쌓인 게 없을 땐 돌아서면 끝이겠지. 그런 이별은 시작보다 오히려 쉬울지도 몰라. 쌓인 게 많으면, 그게 서로에 대한 비난과 미움이라고 해도 그걸 들어낸다는 건 생각만 해도.”
“난 이별이 꽤 낭만적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이별은 태생이 잔인해. 절대 그럴 수 없어.”
“헤어져도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잖아?”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사랑했던 사람이 되고 그게 다시 친구가 된다. 그래서 다른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을 내 친구라 소개한다. 이게 낭만적인가?”
“친구와 사랑해도 헤어지면 그냥 친구인 거잖아? 크게 다르지 않잖아. 모르는 사람이었든 아는 사람이었든 결과적으로는.”
“어떤 사랑이 되었든 나에게는 추억이고 좋은 기억일 수 있지만 새로운 사람에게 그런 것들은 뭐가 될까?”

 

 시아는 그가 채워 놓은 술잔을 집어 들어 가만히 눈을 맞췄다. 그 안에 담겨 흔들리는 술이 지금 자신의 모습 같았다. 마음은 좀처럼 가만히 있지 않았다. 출렁이고 요동치며 모든 것을 흐릿하게 했다. 분명한 건 있었다. 잔 너머에 그. 이현은 그윽한 눈길로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단숨에 잔을 비운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기다란 오이 하나를 입안에 욱여넣었다. 그 사이 그녀가 적막을 깼다.

 

“이기적인 걸까? 나 이기적인가? 꼴불견? 어머, 나 너무 재수 없었지.”
“조금?”
“솔직하게 말해주니 고맙네. 그런데 너는 왜 오늘 같은 날 혼자야?”
“조금 전까지는 그랬지. 지금은 너랑 있지만.”

 

  그녀는 그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러고는 그의 빈 잔을 채웠다. 웃음도 술도 자신의 마음을 채울 순 없었다. 정신없이 떠들고 취해도 텁텁한 기분은 그대로였다. 그녀는 이내 초점 잃은 눈으로 그를 마주했다. 이현은 천천히 그런 그녀를 살폈다. 기분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나갈까?”
“응?”
“가자. 나가서 바람 좀 쐬자.”

 

 이현은 고갯짓으로 정확한 의사를 전달했다. 그녀는 입을 빼죽 내밀고 잠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지갑에서 현금을 꺼내 계산하는 사이에도 말이다. 그녀의 시선은 그에게 머물렀다. 이제 곧 그가 떠나면 다시 현실에 남겨질 것이었다. 그렇다고 그를 영원히 자신의 곁에 붙잡아둘 수는 없었다. 마음이 복잡해진 그녀는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감싸자 머리칼이 쭈뼛쭈뼛 섰다. 인파가 뜸한 구석으로 자리를 옮긴 그녀는 몸을 웅크렸다. 그런다고 추위를 피할 수는 없었다. 코앞에 다가온 또 다른 이별처럼. 몸을 부르르 떨며 담배 한 대 꺼내는 사이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 옆에 선 그도 담배를 꺼내 물었다. 시아는 제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 말고 이현에게 라이터를 건넸다. 그를 시작으로 그녀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란히 선 둘이 연기를 빨아들여 내뱉는 사이 수많은 인파가 그 앞으로 스쳐 지나갔다. 연기는 그보다 빨리 허공으로 자취를 감췄다. 물끄러미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그녀가 운을 뗐다.

 

“이대로 끝인 거겠지?”
“뭐가? 남자친구랑?”
“응.”
“여기엔 헤어지는 거 알고 나온 사람. 헤어지는 거 알고 나오지 않은 사람이 있으니 끝인 거겠지. 어느 정도 결심이 섰으니 나온 거 아니야?”
“그랬지.”
“그래. 오늘은 조금 슬픔에 잠겨 있어도 괜찮아. 충분히 경험하고 빠지지 않으면 괜히 미련만 남는다.”
“큰 이별 겪어본 사람 같네.”
“이별해 보지 않은 적은 없지만 뜨거운 적은 없어서 어떤 기분일지는 모르겠어. 나만 그랬던 걸 수도 있지. 한번 그랬던 적이 있어. 내가 미안해했을 때.”
“미안해했을 때?”
“걔가 그랬거든. 미안해하지 말라고. 어쩔 수 없는 거라고. 내버려 두지 않으면. 그래서 충분히 아파보지 않으면 제대로 이별할 수 없는 거라고.”
“멋진 여자친구였네.”

 

 쓴웃음을 지은 이현은 절반 정도 타다 담은 담배 재를 툭 털었다. 그러고는 연기를 쭉 빨아들였다. 그때 문득 이야기 하나가 생각났다. 연기를 허공에 흩뿌린 그는 재빨리 말을 이었다. 굳이 핑계를 대자면 취기 때문이었다. 

 

“있잖아. 시아야, 사실 고백할 게 하나 있는데.”
“뭔데?”
“왜 아까 이야기가 떠오르는지는 모르겠는데. 이게 지금 내가 피우고 있는 담배가 돛대거든. 그런데 우리가 아까 성냥팔이 소녀 이야기를 잠깐 했잖아. 그 소녀가 마지막 성냥으로 행복한 상상에 빠져서 죽잖아? 내가 죽겠다는 건 아니고. 마지막 소원이 하나 있어.”

 

 피식 웃은 그녀는 꺼져가는 담뱃불을 응시했다. 좀처럼 꺼지지 않는 불을 바라보며 궁금한 듯 그의 입에 집중했다. 그러고는 대답을 재촉했다.

 

“들어나 보자.”
“바다 보러 갈래?”
“지금?”
“응.”

 

 생각보다 담뱃불은 쉬이 꺼지지 않았다. 왜 망설이고 있는지 알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담배 연기를 빨아들인 그녀는 천천히 다시 내뱉었다. 정리되지 않는 마음처럼 연기는 사방으로 흩어졌다. 답보상태인 지금의 상황을 정리한 것은 아마 취기였을 것이다. 아마. 

 

“아무래도 안 되겠어 난.”
“별수 없지. 내가 또 괜한 말을 꺼냈네. 이제 못 볼 거라고 생각하니까 막차를 눈앞에서 놓치는 기분이었어. 어쩌면 내 인생에서 두 번 다시 겪을 수 없는 일일 텐데. 이렇게 떠나보내기엔 너무 아쉬웠거든. 물론 내가 조금 너와 이제 전 남자친구? 아무튼 그사이에 끼어버린 느낌은 있지만.”
“아니, 내 말은. 오늘은 안 되겠다고.”
“오늘은 안 되겠다니?”
“이제 전 남자친구랑 헤어졌는데. 이런 기분으로 어떤 추억이든 만들고 싶지 않아. 물론 너와 마주친 건 꽤 괜찮은 사고였어. 어쨋든 네 말대로 나도 조금은 이별의 시간을 보내고 싶어. 그래서.”
“그래서?”
“내년, 오늘, 우리가 만난 그 시간 그곳에서 만나자. 그리고 그때 가자. 바다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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