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지증왕 3년, 오래전 내린 지독한 어둠이 채 가시기 전이었다. 나이든 기무해의 두 눈은 나라의 흥망성쇠를 논할 때만큼 흔들렸다.

 

“남색이라 했느냐!”
“아버지, 그는 내게 있어 봄날에 핀 꽃이며 여름에 맺힌 과실과 같습니다.”

 

 초연한 기태서는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하늘을 향한 곧게 뻗은 대나무처럼 당당했다.

 

“망측하구나, 망측해! 혹여나 했다. 혹여나. 내, 저 며늘아기가 가여워 씨받이를 들이자는 어른들의 고초도 견뎌냈건만. 뭐라? 남색? 하늘이 두렵지도 않은 것이냐!”
“하늘 아래 두 사람이 연정을 품은 것이 어찌 두렵다는 것입니까. 남자와 여자란 껍데기에 불과하지 않습니까.”

 늘그막에 얻은 독자였다. 가문의 대를 이어나갈 귀한 씨였다. 그런 씨가 썩어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코를 막지 않고선 역겨운 향을 이겨낼 수 없었다. 기무해의 눈초리는 싸늘하게 제 아들을 훑었다. 마립간을 보좌하며 자부심 하나로 살아온 자신의 인생이 송두리째 꺾이고 있었다.

 

“차라리, 차라리. 거짓을 고하거라. 며늘아기가 합방을 해서 손을 본다면 네 놈이 그놈과 무슨 짓을 벌이든지 상관 않겠다.”
“제 마음이 부인에게 닿지 않는 것을 어찌.”
“듣기 싫다!”

 

 화가 치민 기무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목적은 하나였다. 어떻게든 대를 이을 손을 보는 것이었다. 그것이면 가문에 먹칠한 아들놈이야 죽어도 그만이었다. 떨리는 손끝이 멈춘 곳은 마립간이 친히 하사한 검이었다. 날카로운 검날에 스치면 무엇이든 잘려나갈 것이었다. 그것이 끊을 수 없는 어떤 이를 향한 연정이라 해도.

 

“아버지. 어찌.”
“날 아버지라 부르지 마라. 네 놈 같은 자식을 이 가문에 들인 적 없다.”
“검으로 막을 수 있는 마음이라면 진즉 그리했을 것입니다. 잘라낼 수 있었다면 애초에 그리했을 것입니다. ”
“그만! 구역질 나는 그따위 말은 저승에 가서나 하거라!”

 

 날카로운 검의 끝은 기태서의 심장을 향했다. 미끄러져 들어간 검의 끝은 붉게 물든 채 그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쿵쾅거리던 심장 박동은 잦아들었다. 흔들리던 동공은 제 아비의 눈과 마주치자 떨림을 멈췄다. 당황한 기무해는 단단히 쥐었던 검의 손잡이를 놓치고 말았다. 동시에 죽음의 문턱에 들어선 아들은 맥없이 뒤로 넘어갔다. 이제야 서로 한발 물러났지만 어떤 것도 돌이킬 수 없었다. 

 

“흡.”

 

 창 아래 숨어 마음을 졸이던 기태서의 부인, 진여는 가까스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경멸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바짝 웅크렸다. 매일 밤 그녀를 품지 않는 그의 곁에서 했던 익숙한 자세였다. 하지만 이미 새어나간 소리를 돌이킬 수 없었다.

 

 바짝 긴장한 표정의 기무해는 숨을 헐떡이는 제 핏줄을 훑었다. 급한 대로 기태서의 가슴에 박힌 검을 꺼내 들었다. 시선은 창밖으로 향했다. 깊은 새벽이었다. 노비인 사잇놈에게 근처에 아무도 들이지 말라 명한 터였다.

 

“사잇놈이냐.”

 

 떨리는 기무해의 목소리는 창밖을 향했다. 진여는 제 심장 소리가 새어나갈까 숨을 죽였다. 기무해는 미간을 찌푸린 채 창가로 다가섰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훑었다. 핏물이 떨어지는 검의 끝은 조심스레 창밖을 겨눴다. 그리고 그 끝이 굳게 닫힌 창을 밀어내기 전, 낮고 다급한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 

 

“예, 어르신. 부르셨습니까.”

 

 기무해는 창밖과 문밖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스스로 긴장한 탓이리라 마음을 다스렸다. 사잇놈이는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대꾸라도 하지 않으면 충직한 제 노비가 단숨에 방으로 들이닥치리라. 지금의 상황을 자신에게 추궁하기라도 한다면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잠시만 있어 보거라.”

 

 그의 목소리는 다급한 표정과는 사뭇 달랐다. 조금의 망설임이나 떨림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것이 그가 지금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오랜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이내 담담한 얼굴로 숨을 거둔 제 아들을 응시했다. 애도할 시간조차 사치였다. 제 손에 든 검을 다시 기태서의 심장에 밀어 넣었다. 맥빠진 기태서의 두 손은 되는대로 검 손잡이에 걸쳐놓았다. 그러고는 뒤로 털썩 넘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경악을 금치 못하겠다는 표정은 오랜 시간 단련된 듯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사잇놈이는 문을 열어젖히자마자 코끝을 찌른 피비린내에 미간을 찌푸렸다. 가문의 독자는 제 가슴에 스스로 검을 꽂은 채 누워있었다. 가문의 노예는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기태서에게 달려간 그는 먼저 가슴을 살폈다. 삶의 기운이 남아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가슴은 조금도 미동하지 않았다. 심지어 코끝에서도 어떤 생기조차 느낄 수 없었다. 그 또한 제 주인 곁에서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기무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르신…이게 무슨…”

 

 벌벌 떨고 있는 사잇놈과 달리 기무해는 구태의연했다. 분명하고 단호한 눈빛이었다. 오히려 차갑기까지 했다.

 

“불효다. 스스로 제 목숨을 끊는 것을 말릴 새도 없었다.”
“하지만 어찌.”
“네 놈이 이유까지 알려 드는 것이냐?”
“그것이 아니옵고.”
“순장을 치를 것이다.”

 

 한낱 노비인 사잇놈이도 알고 있었다. 마립간이 금한 일이었다. 그런 일이 제 주인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만히 두었다간 온 집안의 모든 노비의 숨이 끊어질지 몰랐다.

 

“하지만 어르신, 그것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게냐. 마립간이 금했다 말하고 싶은 것이냐. 네 놈에겐 내 말보다 마립간의 말이 우선한다는 것이냐. 하룻밤 새 네 놈의 주인이 누구인지 잊은 것이냐.”
“그것이 아니옵고.”
“그러면 네놈이 죽인 것이겠구나. 이 집안의 독자를.”
“아이고. 아닙니다.”

 

 사잇놈은 바닥에 이마를 대고 바짝 엎드렸다. 기무해는 그에게 눈을 흘기며 바닥을 털고 일어났다. 쉬쉬하긴 했지만 아들놈의 남색은 집안의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차라리 이참에 모두 죽여 그 입을 막아버리는 것이 나았다. 

 

“당장 가서 마당으로 모든 사람을 불러 모으거라.”
“예, 어르신.”

 

 겁에 질린 사잇놈이는 제대로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중심을 잡지 못해 몇 번을 넘어졌다. 그 사이 창밖의 진여는 웅크렸던 몸을 폈다. 달아나야 했다. 이대로 허무하게 생을 마감할 수 없었다. 제가 아닌 누군가가 자신의 숨을 끊는 것을 허락할 수 없었다. 기무해가 말한 모든 사람 중 첫 번째는 자신일 것이 분명했기에.

 

 진여는 숨을 죽인 채 최대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작은 소리라도 냈다간 즉시 목이 떨어질 지 몰랐다. 마음이 급한 것은 사잇놈이도 마찬가지였다. 제 핏덩이라도 살려야 했다. 집안의 독자가 목숨을 잃은 것과 제 피붙이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는 부리나케 그곳을 떠났다. 그 사이 기무해는 재빨리 굳게 닫힌 창문을 열어젖혔다. 분명 사잇놈이가 아닌 다른 이가 내는 소리가 있었다.

 

 창 밑부터 주변까지 꼼꼼하게 모든 흔적을 살폈다. 제 거처에 이르는 길의 끝까지 그의 시선이 닿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맞은편 사랑채 사이로 난 좁다랗게 난 길, 그 끝에 누군가 있었다. 달빛에 드리운 그림자는 다급한 몸을 숨겼다. 기무해의 매서운 눈길에서 완전히 숨을 순 없었지만.

 

 다급해진 그는 기태서의 몸에 박아 놓은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재빨리 거처 밖으로 뛰쳐나왔다. 제 아들의 몸에 검을 찔러 넣을 때보다 가슴은 두근거렸다. 분명 치맛자락이었다. 곧 동이 틀 때가 되었으니 누군가 근처를 서성일 수도 있었다. 제 착각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확실히 해서 나쁠 것은 없었다. 치맛자락이 사라진 방향은 제 아들 내외의 거처였다. 그곳부터 확인해볼 참이었다. 

 

 성큼성큼 옮기는 걸음으로 그는 단숨에 제 거처를 지나쳤다. 뿜어져 나온 입김은 그 뒤로 길게 흩날렸다. 하늘을 채우기 시작한 여명은 어느덧 아들 내외의 거처 앞에도 이르렀다. 채 마르지 않은 피는 뚝뚝 떨어지며 마당에 수를 놓았다. 숨을 고르던 기무해는 걸음을 멈춘 채 주위를 가만히 살폈다.

 

“아가 자느냐?”

 

 담벼락을 넘지 못한 소리는 주위를 울렸다. 나긋한 목소리는 잠에 빠지듯 듣는 이를 죽음으로 이끌 것이었다. 마루 밑에 몸을 숨긴 진여는 숨을 죽였다. 무슨 소리라도 낸다면 이대로 자신은 죽은 목숨이었다. 이른 새벽에 기무해가 제 거처를 찾는 일은 없었다. 찾는다 하여도 사잇놈이나 다른 몸종들이 올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 거처에 머물고 있어야 할 이는 진여, 자신뿐이라는 걸.

 

 기척이 없자 기무해는 조심스레 마루 위로 걸음을 옮겼다. 삐걱 거리는 소리조차 새벽에 잠길 정도로 조심스럽게 발을 내디뎠다. 방문 앞에 이른 그는 차분하게 문고리를 당겼다. 그제야 모든 의심은 확신이 되었다. 사잇놈이는 순장을 준비할 것이 아니라 진여부터 찾아야 했다. 분을 이기지 못한 그는 씩씩거리며 고개를 돌렸다.

 

“여보…당신.”

 

 기무해의 부인은 차디찬 땅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초점 잃은 시선은 정처 없이 움직였다. 이 새벽에, 뒤집어진 눈으로 제 아들 내외의 거처에서 나오는 이를 곱게 볼 사람은 없었다. 더군다나 피 묻은 검이라니.

 

“부인… 우리 태서가...”
“태서가?”
“우리 아가, 아니 진여 그년이 찔러 죽인 것이 분명하오. 그년이 아이를 생산하지 못하는 것에 분을 품고 죽인 것이오. 제 서방이 품지 않는다고 어디 가서 몸을 굴린 것이지. 내 오늘 이 일대에 다 불을 지르더라도 그년을 찾아 꼭 죽일것이오.”
“태서가 죽다니요. 우리 며늘아기가 그랬다고요?”

 

 기무해의 부인은 연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의 곁으로 달려온 기무해는 곁에 검을 내팽개쳤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이는 부인뿐이었다. 혹여나 부인이 자신의 비밀 중 어떤 것이라도 알게 된다면 그걸로 자신의 생도 끝이었다. 아들을 죽인 것이든 며늘아기를 죽일 일이든 상관없었다. 제 머리만 떨어지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 제 일가친척 모든 이의 숨이 끊어진다 해도 누구 하나 나서지 않을 것이었다. 배다른 형제라 해도 그녀는 마립간의 누이였다. 그는 온 신경을 집중해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랬다오. 부인. 꼭 그년을 찾아 우리 가문의 명예를 되찾으리다.”

 

 기무해가 그녀의 등을 어루만지는 사이 꺽꺽거리는 소리도 잦아들었다. 성난 바다처럼 거친 호흡도 잔잔해지고 있었다. 멍한 그녀의 두 눈은 텅 빈 제 아들 내외의 거처를 향했다. 손 뻗으면 닿을 것 같은 어제의 흔적을 좇고 있었다. 두 번 다시 이곳에서 들리지 않을 웃음소리, 아장아장 걷던 그 어린 날의 시절까지. 그러다 그녀의 시선은 한곳에 머물렀다. 어린 기태서가 제 아비의 혼찌검을 피해 달아났던 그곳, 마루 아래 비좁은 틈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몸을 바짝 웅크린 진여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처음엔 그것이 짐승은 아닐까 했다. 그러나 마루를 벗어나 담벼락에 매달리는 그것은 분명 사람이었다. 어미가 제 아들을 죽인 이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그녀를 등진 기무해에게나 가능한 일이었다. 늦은 밤 홀로 맹수를 만난 것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담벼락을 향해 검지를 곧게 뻗는 사이 진여는 이미 담벼락 뒤로 자취를 감췄다.

 

“여보!”
“무슨 일이오, 부인. 내 여기 있소.”
“진여! 그년이!”

 

 부인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 기무해는 그제야 사태를 파악했다. 바닥에 떨어진 검을 주워든 그는 담벼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여인의 걸음으로 달아난다 한들 얼마 버티지 못할 것이었다. 떠나는 길에 숨만 찰 뿐이었다. 가볍게 담을 넘은 그는 담벼락 주위를 살폈다. 녹지 않은 눈 위에 난 발자국은 자신을 진여에게 안내하고 있었다.

 

  하늘은 어느새 빛을 머금었다. 주위의 것들은 점점 분명해졌다. 나이가 들었다지만 기무해의 몸짓은 날랬다. 눈을 헤치는 발걸음 사이로 미처 떨어지지 못한 나뭇가지 위 눈발이 휘날렸다. 새벽의 고요함도 한 발치 물러섰다. 먼발치서 보이던 진여는 금세 지척거리에 다다라 있었다.

 

 거친 숨을 내뿜던 진여는 인기척에 잠시 고개를 뒤로 돌렸다. 제 지아비의 피가 묻은 검의 끝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기무해의 얼굴은 성난 짐승 그 이상이었다. 며칠간 굶주린 짐승의 얼굴도 그보다 소름 끼치지 않을 것이었다. 필사적으로 발을 내디뎠다. 쌓인 눈은 푹푹 들어가며 그녀의 간절함을 끌어당겼다. 옷가지 여기저기에 걸리는 나뭇가지 또한 그녀를 저지했다. 이제 기무해는 그녀의 등 바로 뒤에 있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조금도 벗어나거나 치우치지 않고 정확하게 그녀를 넘어뜨렸다.

 

“이게 다 무슨 짓이냐. 너나 나나 이런 고생 할 필요 없다. 아가야.”

 

 기무해의 가슴은 거친 숨에 연거푸 부풀어 올랐다. 검의 끝은 아스라이 퍼지는 입김을 지나쳤다. 제대로 일어나지도 못한 채 몸만 돌려 뒷걸음질 치는 진여를 향했다. 

 

“듣기 싫소! 아가라 부르지도 마시오! 제 피붙이를 죽인 당신 같은 인간에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소!”
“피붙이라 부르지 말거라. 난 그런 자식 낳은 적 없다.”
“이러지 말고 그냥 보내 주시오. 어디든 가서 죽을 때까지 내 이름 한자 들리지 않게 하겠소. 흐르는 물이나 날아가는 새에게도 내 소식 들리지 않겠소.”
“너도 알지 않느냐. 아들놈, 그놈이 남색 한다는 사실을 감추려 했지만 감출 수 있었느냐.”

 

 진여는 계속 몸을 쉬지 않고 움직였고 그것은 기무해도 마찬가지였다. 조금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여기서 진여의 숨통을 끊고 순장으로 제 집안의 모든 종놈을 묻으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누구도 다시는 그 일을 입에 올리지 못할 것이었다. 제 집안의 치욕은 그저 바람결에 날리는 한낱 소문에 불과하게 될 뿐이니까.

 

“그래서 죽인 것이오? 그래서? 숨통을 끊어 놓고 묻으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고 믿는 것입니까?”
“잘못 짚었다. 그것이 아니다. 그런 입방아찧기 좋은 이야기가 사라지겠느냐.”
“그러면 대체 무엇이오.”
“두려움이다. 두려움은 눈 뜬 이를 장님으로 만든다. 귀 밝은 이를 귀머거리로 만들기도 한다. 하물며 호사가들을 벙어리로 만드는 일이 어렵겠느냐? 바로 그것이다.”

 

 순간 강직하고 대들보 같던 기무해가 그렇게 가여워 보일 수가 없었다. 적어도 그의 삶엔 대의가 있다고 믿었다. 그가 내리는 모든 결단과 행하는 모든 일들에 이유가 있다고 말이다. 그 모든 것은 오로지 제 안위만을 위한 것이었다. 부인이나 피붙이에 관한 그 어떤 것도 없었다. 하물며 나라의 마립간을 위한 그 어떤 것도. 

 

“그리도 두려웠소? 기태서가 사내와 알몸을 비빈다는 사실이 아니라, 마립간 옆의 자리가 아까웠던 것 아니오?

 

 기무해의 동공은 심하게 흔들렸다.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미간을 구긴 후에도 분이 사그라지지 않는지 한참을 씩씩거렸다. 순간 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아마 기태서를 찌를 때의 눈빛이 그러했을 것이다.

 

“네까짓 년. 죽어서 썩어 문드러져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을 년. 죽기 전에 내가 은혜를 베풀겠다. 태서놈한테 쌓인 원한 내가 풀어 주겠다. 그 많은 밤을 홀로 얼마나 저주를 퍼부었을꼬. 내가 그 한을 안다. 그래서 나한테 이리도 모질게 구는 것이겠지. 그 마음 내가 품어주겠다.”

 

 얼어붙은 진여는 소리도 지르지 못했다. 처음부터 벙어리였는지 몰랐다. 벌린 입에선 애처로운 입김만 흘러나왔다. 어느새 그녀의 다리 끝에 무릎 꿇은 기무해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녀를 훑었다. 봉긋 솟아오른 가슴에서부터 치맛단 사이로 드러난 새하얀 발목까지. 그는 검을 내던진 후 그녀의 가녀린 발목을 움켜쥐었다. 애써 발버둥 쳤지만 주름진 악독한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오히려 기력만 쇠할 뿐이었다. 

 

“왜 그러느냐, 대체. 네년도 기태서 그놈처럼 아비의 마음을 조금도 헤아릴 수가 없는 것이냐!”

 

 진여의 눈에선 급기야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더 가여웠다. 펼쳐진 치마 밑으로 드러난 속치마는 말려 올라가 허벅지까지 드러나 있었다. 하얗고 매끈한 허벅지를 보자 기무해의 아랫도리는 더 달아올랐다. 그는 내친김에 저고리에 손을 뻗었다. 이를 악문 진여는 간신히 그의 손을 잡아챘다. 당황한 그는 다짜고짜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맥없이 돌아간 그녀의 얼굴은 눈에 파묻혔다. 그 사이 기무해는 자신이 내던진 검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이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온 모양이었다. 몸을 일으킨 그는 매서운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찢어진 입술에서는 붉은 피가 흘렀다. 흘러내린 피 아래로는 반쯤 드러난 가슴에 시선이 머물렀다. 매끈하고 찬 기운에 붉게 달아오른 것이 제 부인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버틴다고 달라질 것이 있는 줄 아느냐. 아리 그년, 그래 사잇놈이 짝. 그년은 처음부터 순순히 몸을 내어준 줄 아느냐. 그년도 처음엔 다 너와 같았다.”

 

 입꼬리가 올라간 그는 무언가를 떠올리는 듯했다. 초점 잃은 두 눈은 허공을 향했다. 손은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어 지팡이로 삼았다.

 

“그걸 기태서 그 놈에게 들키지만 않았어도.” 

 

 진여의 시선은 제 가슴 어귀에 머물렀다. 기태서와 혼인한 그 날 밤, 그녀를 품는 대신 준 선물이었다. 이렇게 유품이 되리라고는 주던 그도 생각지 못했을 터였다. 단도에 아로새긴 꽃 한 송이는 그녀를 뜻한다 했다. 절대 이 단도를 쓸 일이 없게 지키겠노라 다짐했던 그였다.

 

 다짐도, 다짐했던 이도 곁에 없었다. 그녀는 이를 악물었다. 기무해는 지척 거리에 있었다. 삶에 어떤 뜻이 있진 않았다.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기무해 같은 인간이 살아남아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의 검에 숨을 거두고 싶지도 않았다. 단도를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시린 공기는 그녀의 온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손끝은 정확했으며 민첩하기 그지없었다.

 

“악!”

 

 외마디 비명이 적막을 깼다. 기무해의 발등에서 흘러나온 피는 새하얀 주위를 물들였다. 검을 휘두를 엄두도 내지 못한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진여를 마주했다. 흘러내린 저고리를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인 그녀는 그의 발등에 박힌 단도를 단숨에 빼냈다.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그 사이 단도의 끝은 그의 목을 향했다. 아마 잠시 후면 그의 얼굴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구겨지리라.

 

“푹.”

 

 단도가 목을 관통하는 소리보다는 깊은 소리였다. 기무해가 움켜쥔 검의 끝은 손쉽게 진여의 배를 관통했다. 등 뒤로 빠져나온 검에선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당황한 진여가 기무해를 노려보아도 달라질 건 없었다. 새어 나오기 시작한 피는 어느새 그녀의 온 몸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손에 힘이 풀린 그녀는 손에 쥐었던 단도를 떨어트렸다. 맥 없이 떨어진 단도가 바닥에 나뒹구는 사이 기무해는 검을 뽑아냈다. 그로 인해 벌어진 상처로 더 많은 피가 흘러나왔다. 배를 움켜쥔 진여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 몸을 웅크렸다. 

 

 추위는 느낄 수 없었다. 지아비를 잃은 슬픔도 잠시였다. 그저 숨을 헐떡이며 기태서가 자신에게 남긴 환한 웃음을 떠올리는 것이 다였다. 기무해는 힐끗 그녀를 바라본 후 제 거처를 향해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진여는 혼잣말을 되뇌었다.

 

“꽃 같다 하지 않았소. 그대는 봄에 피는 꽃과 같지 않고, 여름에 무성한 풀 같지 않으며, 가을에 진 단풍 같지 않으니 그 아름다움을 무엇으로 말할까. 겨우내 홀로 고개를 드러낸 꽃같이 내게 제일가는 아름다움이라. 그대에게 연정을 두지 못하고 그대를 품지 못하니 내 평생을 속죄하며 살리다.”

 

 기태서가 혼인 첫날밤 그녀에게 해준 말이었다. 아득해지는 정신처럼 모든 감정과 기억도 흐릿해졌다. 뼛속까지 파고든 추위는 호흡마저 앗아가고 있었다. 흐리멍덩한 두 눈은 기무해의 발자취를 좇았다. 눈 위에 새겨진 발자국은 다른 흔적과 뒤섞여 혼잡했다. 그는 진여에게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멈춰있었다. 담벼락에 몸을 기댄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이었다.

 

“퍽!”

 

 크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기무해는 그대로 고꾸라졌다. 사방으로 튄 피는 주위에 붉은 점을 찍었다. 사잇놈이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담벼락을 단숨에 넘었다. 한 손에는 피로 붉게 물든 큼직한 돌이 들려 있었다. 기무해의 곁으로 다가온 그는 자세를 낮췄다.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것을 확인한 그는 주둥이를 파르르 떨리는 귓가에 갖다 댔다. 강하고 낮게 깔린 목소리엔 힘이 있었다.

 

“그 몹쓸 짓을 해놓고선? 아직까지 숨이 붙어 있는 것이오? 누가 죽을 짓을 했는가 말해보시오! 순장이라고 했소? 누가 누굴 죽이고 살린단 말이오? 아리 그것도!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발버둥을 쳤는데!”

 

 사잇놈이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문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죽여버렸어. 아리도, 마님도 다 죽여버렸어. 이제 어르신도.”
“푹.”

 

 기무해의 검은 정확하게 사잇놈이의 목을 찔렀다. 제 목을 움켜쥔 그는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황망한 그의 두 눈은 멀지 않은 곳을 향했다. 진여가 누워있는 그곳이었다. 그녀의 두 눈이 스르륵 감겼다. 잠은 그녀의 혼을 잡아당겼다. 퍼져 나간 붉은 혼은 사방을 물들였다. 그렇게 그녀는 하얀 눈 위에 피어오른 한 송이 붉은 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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