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행 가고 싶어.

 

“주아, 니가 거길 가면 내가”
“뭐?”
“아니.”
“그러니까 뭐?” 

 

 조롱 섞인 눈빛에 이어질 힐난은 굳이 상상할 필요도 없었다. 온몸에 찌든 기름 냄새는 낙인이라도 된 듯 쉬이 가시지 않았다. 마치 그녀의 태생을 증명하듯 주위에 머물렀다.

 

“돈은 그렇다 치더라도 영어도 한마디 할 줄 모르면서 뉴욕을 어떻게 가냐?”
“갈 수 있어.”
“뉴욕이 미국 어디에 있는지나 아냐?”

 

 불이 꺼진 패스트푸드 가게 앞의 둘을 비추는 조명도 하나둘 숨을 죽였다. 주아의 머릿속에서 길을 잃은 생각의 꼬리처럼. 부아가 치밀었다. 무슨 말이라도 내뱉지 않으면 오늘 밤은 잠을 이루지 못할 터였다. 잠시 생각에 잠긴 그녀의 가운데 손가락은 자신의 사고보다 빨리 움직였다.

 

“야! 이 년이!”
“중심에 있다고. 세상의 중심에.”
“기도 안 찬다.”
“그리고 나 영어 할 줄 알거든.”
“어디 한번 해봐라.”

 

 주아는 수북이 쌓인 기억의 먼지를 털어내어 다분히 고상한 문장 하나를 떠올렸다.

 

“How are you?”

 

 그녀는 가만히 친구의 표정을 살폈다. 알 수 없는 표정의 친구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고는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제 가운데 손가락을 곧게 펴 보였다.

 

“야! I’m fine이라고 해야 할 거 아니야!”
“Welcome이다! 아주!”

 

 친구의 항변에 주아는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온 세상이 그렇게 자신을 비웃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세 가지 문제만 해결된다면 그 생각은 그녀의 머릿속에만 머물 것이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문제가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었다.

 

“조금 늦었지? 미안.”

 

 오랜 시간 그녀의 곁을 지켰던 기태였다. 어떤 순간에도 그를 떠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세상 모든 존재가 그녀에게 등을 돌려도 그는 자신을 지킬 유일한 존재였다. 그런 존재를 자신이 먼저 떠나야 할 이유는 없었다. 뉴욕이 자신의 중심이 되기 전까지는. 미간을 찌푸린 그녀의 눈동자는 멋쩍게 웃는 그의 두 눈동자와 마주했다.

 

“나 사랑해?”
“그걸 말이라고 하냐.”
“얼마나?”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우선 좀 걸을까?”

 

 주아의 친구는 그녀의 손짓에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홀로 가게 문을 닫는 게 익숙한 듯 더는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주아 또한 그 상황이 익숙한 듯했다. 기태는 또한 별다른 대꾸 없이 그녀를 따라나섰다. 거리의 화려한 불빛은 길을 가득 채웠다. 음식점에서는 모든 냄새가 흘러나왔다. 고기 굽는 냄새와 찌든 담배 연기, 지나가는 사람들의 술 냄새까지. 그 모든 것은 그녀가 숨을 그늘이 되었다.

 

“기태야. 나 있잖아.”
“응. 듣고 있어.”
“뉴욕에 갈 거야.”
“뉴욕?”

 

 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헝클어진 머리만큼 복잡한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자신이 늦은 것 때문일지 아니면 다른 것이 원인일지 알 수 없었다. 서둘러 이 수수께끼 같은 대화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생각뿐이었다.

 

“언제?”
“준비가 끝나면?”
“뭐하러 가는데?”
“잘 모르겠어. 그냥 가보고 싶어. 아니, 꼭 갈 거야.”
“얼마나 가려고?”
“글쎄. 한 달? 아니. 일 년? 그래. 그쯤이 좋겠다.”

 

 결국, 그의 사고는 정지했다. 덩달아 그의 걸음도 멈췄다. 온화했던 표정은 온데간데 없었다. 인내에 한계에 다다른 그의 두 눈동자는 그녀를 원망했다. 낌새를 눈치챈 그녀 또한 걸음을 멈췄다. 고개를 돌려 그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둘 사이의 공기는 차갑게 변했다.

 

“헤어지자는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뭔데?”
“말투가 왜 그래?”
“내 말투가 어때서? 그딴 식으로 빙빙 돌리는 너보다는 한참 나은 거 아니야?”
“야! 정기태!”

 

 그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녀의 시선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손에 들린 애꿎은 하얀 서류를 만지작거렸다. 알고 있었다. 어쩌면 오히려 먼저 말을 꺼내 준 그녀에게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할 지도 몰랐다. 체념한 듯한 그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무언가 결심한 듯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사실 오늘 내가 할 말이 있어서 온 거야. 차라리 잘 됐어. 너라면 분명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알아듣게 말을 해.”
“나 군대가. 기다려달라고 말하려던 참이었는데. 이렇게 돼서는 내가 너무 비참하다. 처음부터 헤어지자고 말을 하지. 그랬으면 내가 조금 덜 비참했을 텐데. 이제 와서 그게 무슨 소용이겠냐만.”

 

 망치로 머리를 한대 얻어맞은 듯 멍했다. 그녀의 사고는 완전하게 정지했다. 어떤 말도 꺼내 놓지 못했다. 그 사이 그는 고개를 돌렸다. 둘의 사이는 점점 멀어지기 시작했다.

 

“갈게. 잘 지내.”

 

 그렇게 한가지 고민이 해결되었다. 다음 고민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기태가 시야에서, 또 기억에서 멀어져가는 사이 주아는 휘청거렸다. 감당하지 못할 이별의 무게 때문이 아니었다. 어지러웠을 뿐이다. 불분명한 의식의 흐름 사이에 말 한마디가 자취를 드러냈다. 의사에게 들었던 마지막 말이었다.

 

‘길어야 6개월입니다.’

 

#2. 일어나면 그만인데.

 

 밝고 환한 빛. 눈이 부셨다. 이미 숨이 다한 것은 아니리라. 코끝을 찌르는 소독약 냄새가 아직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녀 곁의 새미는 눈물을 글썽였다. 근심 어린 표정은 좀처럼 거두지 못했다. 아마, 의사의 마지막 말이 그녀에게 공유된 모양이었다.

 

“새미! 알바는 어쩌고?”
“그냥 누워 있어.”

 

 그녀의 만류에도 주아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누워 있으면 니가 나 뉴욕에 데려다줄 거야?”
“미친년. 정말 너도 정상은 아니다. 그 몸으로 가긴 어딜가.”
“새미. 여기 누워 있으면. 언제까지 내가 여기 누워 있을 수 있겠냐. 길어야 6개월이라고 했어.”
“다른 병원에 가보자.”
“새미.”

 

 주아는 떨리는 그녀의 두 손을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물끄러미 두 눈을 마주했다. 그녀의 눈가에 고여있던 눈물이 범람했다. 입꼬리를 올린 주아는 비아냥거렸다.

 

“나 아직 안 죽었잖아. 벌써 이렇게 울면 나중에 어떻게 하려고?”
“넌 진짜,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오냐?”
“아직 살아 있잖아. 그럼 된 거지. 새미. 나 이렇게 여기 있을 수가 없어.”
“방법을 찾아보자.”
“있잖아. 나. 여행이라고 가본 적이 없어. 흔한 수학여행 한번 말이야. 너도 알잖아.”

 

#3. 이제는 추억이라 말할 수 있는.

 

 이제는 기억나지도 않는 부모님 얼굴. 어린 주아에게 삶은 참 모질었다. 어린 그녀에게 주홍글씨처럼 따라다닌 한 마디는 이랬다.

 

‘애미 애비 잡은 년.’

 

 이제는 세상에 없는 할머니가 그녀에게 지어준 다른 이름이었다. 부모와 주아가 함께 당한 자동차 사고에서 그녀 혼자만 살아남은 것이 이유였다. 술에 취해 손찌검이 시작되는 날이면 그녀는 몸을 웅크렸다. 저항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면 죄책감이 조금이라도 가실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멍과 상처만 늘었다. 특히 마음에 남은 분노와 생채기는 더 큰 상처가 되었다.

 

‘꼰대.’

 

 세상의 하나 남은 혈육을 그녀는 속으로 그렇게 불렀다. 한 번도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었다.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런 말을 듣는다고 해서 스스로 인정하지도 않을 것이기에.

 

 

 시간은 무심히 흘러갔다. 할머니의 허리춤에 가까스로 닿던 키는 어느새 머리 하나는 더 있게 됐다. 그렇게 열일곱이 된 어떤 날 그녀는 입을 열었다.

 

“갈게. 잘 지내.”

 

 그녀를 괴롭히던 속박과 구속에서 뗀 첫걸음이었다. 첫걸음마를 뗀 그녀를 본 부모의 표정이 자신 같았으리라.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뒤통수에 욕지거리가 쏟아졌지만 상관없었다. ‘애미 애비 잡은 년’은 응당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렇게 집을 나온 첫날, 갈 곳 없는 그녀는 우두커니 길 한구석을 차지했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패스트푸드 가게 옆 골목이었다. 휘황찬란한 불빛에 생긴 그림자가 그녀를 감쌌다. 까마득한 아늑함을 느꼈다. 어미의 부드럽고 따스한 품 같았다. 이런 느낌이 존재했는지조차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곳엔 ‘꼰대’의 성난 목소리도 매질도 없었다. 폐점 준비를 하는 새미의 의구심 가득한 눈빛만 없었다면 완벽한 순간이었다.

 

“집 나왔어?”

 

 주아는 대답 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대답을 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 그녀를 곁에 붙들어 놓아야만 했다. 이렇게 나타난 구원자를 그냥 보낼 수 없었다.

 

“새미야. 안에 정리는 끝났는데.”

 

 기태는 누군가를 응시하는 새미를 발견했다. 이윽고 그런 그녀를 응시하던 주아를 발견했다.

 

“어?”

 

 벌어진 입은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았다. 몸은 주아를 향해 서 있었지만 긴장한 두 눈동자는 사방을 향했다. 그를 발견한 주아가 그와의 거리를 좁히는 사이 증상은 더욱 심각해졌다.

 

“기태! 너 여기서 뭐 해?”
“내 이름 알고 있었네?”
“당연하지. 같은 반인데. 그리고 벌써 한 학기가 지났는데 모르는 게 이상한 거 아니야?”
“아니 난. 아니 그게 아니라. 아니 아닌 게 아니고. 나 여기서 일해서.”

 

 늘 이런 순간을 원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말을 꺼내는 순간, 어떤 실수라도 모든 기회를 영영 잃게 할까 두려웠던 그였다. 더 완벽하고 완전한 순간에 이뤄지길 원했다. 적어도 햄버거 냄새에 찌든 지금은 아니었다. 긴장감이 팽배한 사이, 새미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기태야. 너랑 얘랑 둘이 아는 사이야?”
“아니. 어.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얘는 오늘 왜 이렇게 어버버 거려. 거기 너.”
“나?”
“그래. 거기 너밖에 없잖아.”

 

 새미의 말투엔 날이 서 있었다. 주아는 개의치 않았다. 어떤 누가 자신에게 차갑게 대하더라도 지나온 세월을 뛰어넘을 수 없었다. 초조한 기태의 시선만 분주했다. 숨을 깊게 들이 마신 그녀는 새미의 두 눈을 마주했다.

 

“나 왜?”
“아직 내 질문에 대답 안 했는데.”
“아, 참. 내 정신 좀 봐. 나왔어. 오늘.”
“갈 데 있어?”

 

 주아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시선을 다시 그녀에게 돌렸다. 피식 새어 나온 웃음을 참지 못했다.

 

“우리랑 같이 갈래?”

 

 주아는 잠시 뜸을 들였다. 가출팸이다 뭐다 흉흉한 세상이었다. 기태를 안다고 했지만 잘 아는 것은 아니었다. 또한, 새미는 생면부지의 사람이었다. 묘한 분위기는 기태의 말로 정리되었다. 정리라고 표현하기에 애매한 부분은 있지만 달리 표현한 말도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 나쁜 애들은 아니야. 주아 너도 봐서 알겠지만 새미 쟤가 표정은 저래도 착한 애 거든. 나도 그렇고. 나한테 내가 나쁘지 않다고 말하는 건 조금 그렇긴 하네. 그래도 넌 오늘 이렇게 길가에서 지낼 수는 없잖아. 아, 미리 연락을 좀 하긴 해야 하는데 괜찮을 거야.”

 

 주아는 한쪽 눈썹을 추켜세웠다. 약속이나 한 듯 새미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안중에도 없는 기태는 신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늦은 밤 기다리던 엄마를 만난 아이처럼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엄마. 새 친구 데리고 가도 돼요?”

 

 기태가 통화에 빠진 사이 주아는 새미의 곁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제 입을 그녀의 귓가에 갖다 댔다.

 

“그래서 도대체 거기가 어딘데.”
“나눔의 집.”

 

#4. 오늘부터는.

 

 지난날을 떠올리던 주아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었다. 창가에 시선이 머무는 사이 기억은 수학여행을 떠나던 날 아침에 다다랐다. 그날도 그랬다.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연락 왔다.”

 

 그녀의 담임은 어쩔줄 몰라했다. 그 말에 그녀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교무실에서 마주 앉은 그녀의 두 손을 말없이 쓰다듬는 것밖에는. 집을 나온 뒤로는 스스로 흔적을 찾아본 일이 없었다. 다만 ‘나눔의 집’ 엄마가 가끔 소식을 전해 주면 생사 정도 확인할 뿐이었다.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울면 돌아가신 엄마가 생각날 것만 같았다. 아빠도 말이다. 이제는 얼굴조차 희미했다. 성난 할머니의 모습은 그나마 선명했다.

 

 화장장의 뜨거운 열기는 모든 것을 불태웠다. 좋았던 기억. 좋지 않은 기억 모두. 이제 자신은 세상에서 완전하게 혼자였다. 제게 남은 것은 빛바랜 가족사진 한 장이었다. 그 사진에서는 모두가 웃고 있었다. 오래된 시절이 눈앞에 그려졌다. 포근한 엄마의 품과 부드러운 아빠의 목소리. 이제는 정말 없어져 버린 그녀의 할머니까지.

 

#5. 어렵지 않다니까.

 

 두 번째 고민도 그렇게 해결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금전적인 문제와 행정 절차였다. 행정 절차야 차치하더라도 돈은 큰 문제가 되었다. 주말까지 일을 한다면 시간을 더 당길 수 있었다. 하지만 몸이 버티지 못할 것이었다. 비행기도 타기 전에 일터에서 쓰러져 실려 나갈 생각은 없었다.

 

 패스트푸드 가게 오픈 전 주아는 손을 분주하게 놀렸다. 필요한 경비는 200만 원으로 계산했다. 항공권과 체류비를 합한 금액이었다. 한 달에 60만 원에서 생활비를 빼면 40만 원이 남았다. 다섯 달이면 필요한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고작 다섯 달이면.

 

#6. 편도 티켓

 

 항공기는 천천히 활주로를 향해 움직였다. 기태가 그녀를 처음 만난 날처럼 그녀는 시선을 한곳에 두지 못했다. 기대에 부푼 그녀의 마음은 입꼬리를 밀어 올렸다. 이내 이륙 준비를 마친 항공기는 신호를 기다렸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고 다들 말했다. 그녀 자신조차 의구심을 품고 있던 일이었다. 절대 몸이 버텨내지 못하리라 생각했었다.

 

“짜식. 대견하다.”

 

 창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던 그녀는 제 머리를 쓰다듬었다. 순간 항공기가 육중한 소리를 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떨림은 온몸을 뒤흔들었다. 요란한 소리는 주위를 가득 채웠다. 얼마나 지났을까 제 몸이 붕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그녀의 눈은 스르륵 감겼다.

 

#7. 아메리칸 드림

 

 절벽에서 발을 헛디딘 듯 아찔한 기분이었다. 깨어났을 때만 해도 잠시 존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온몸을 뒤덮은 식은땀은 정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수 없이 되뇄다. 주문처럼. 그러면 온 우주가 그녀의 바람을 듣고 소원을 들어주기라도 할 것처럼.

 

‘지금은 안돼. 조금만 더 버텨줘.’

 

 주문 탓이었을까 그녀는 무사히 JFK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입국심사를 마치고 짐을 찾는 과정에서도 딱히 어려움은 없었다. 지금은 막 ‘Times sq-42’ 역에 도착하는 지하철에서 내리기 위해 몸을 일으켜 세우는 중이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멈춰선 지하철은 문을 열어 그녀를 환영했다.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러고는 당당하게 개선문을 통과하듯 발걸음을 내디뎠다.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지나가는 사람들 몇몇이 눈을 흘겼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다시 볼 수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다. 개찰구를 빠져나와 출구를 확인하는 중에도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사람이 행복할 수 있는지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다. 그저 걷는 것. 숨을 쉬고. 주위를 둘러보는 것마저 행복했다. 조금만 더 이 행복이 제 곁에 머물기를 원했다.

드디어 출구로 빠져나온 그녀 앞에는 빌딩이 빽빽하게 줄지어 서 있었다. 간간이 보이는 청명한 하늘에는 군데군데 뭉게구름이 둥둥 떠 있었다. 바람은 선선했다. 등에 멘 가방끈을 양손으로 힘껏 움켜쥔 그녀는 앞으로 향했다. 대부분의 사람이 한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아마 그녀와 목적지가 같은 모양이었다.

 

 곁으로는 많은 차와 함께 뉴욕의 명물이라는 노란 택시가 간간이 스쳐지나갔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 타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사실 타임스퀘어에 가보는 것 말고 아직 별다른 계획은 없었다.

걸음이 계속되는 사이 그녀는 다소 우중충한 건물 숲을 벗어나고 있었다. 이윽고 다양하게 빛나고 있는 광고판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마침내 멀지 않은 곳에서 꿈에 그리던 그곳을 발견했다. 요동치는 가슴을 주체할 수 없었다. 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어느새 그녀는 달리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싼 수많은 광고판. 그리고 여기저기서 모여든 다양한 사람들. 인터넷에서 보아왔던 그곳이 맞았다.

 

 잠시 걸음을 멈춘 채 숨을 고르는 사이 그녀는 생각했다. 왜 여기였을까. 예기치 못한 순간에 생을 마감해야 한다면 여기 뉴욕보다 멋진 곳은 더 많았을 텐데. 그리고 그녀는 떠올렸다. 오래된, 이제는 희미해진 기억. 그녀의 부모가 나눴던 마지막 대화였다.

 

“여보, 나 여행 가고 싶어.”
“지금 다녀오고 있는데?”
“해외.”
“지금은 주아 어려서 힘들잖아.”
“어머님께 맡기고 다녀올까? 표정 봐라. 농담이야 농담.”
“그래서 어디 가고 싶은데?”
“글쎄, 미국? 샌프란시스코도 좋고. 아니면 뉴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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